글/다이에이

[미사와] 만우절 거짓말 4

르체 2016. 3. 25. 23:00



 미유키가 사와무라를 찾아 낸 곳은 기숙사 건물 뒤, 화단 옆에서였다. 숨죽이고 훌쩍거리는 소리마저 없었다면 찾아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진 밤에 가까운 시간. 항상 연습으로 시끄러웠던 기숙사는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했다. 


 졌다.

고시엔 준우승. 그게 미유키가 3학년 여름, 마지막으로 남긴 성적이었다.


 물론 사와무라를 비롯한 모두는 잘해줬다. 굳이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면 야구의 신이 상대편에 미소 지어줬다고 해야 할 정도로 완벽한 경기였으니까. 평소 이상의 기량을 발휘해 준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역시 진 건 분했다. 앞으로 한 발짝이었는데. 하지만 이상하게도 미유키는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엉엉 우는 와중에, 침착하게 짐을 정리했다. 스스로도 이렇게 침착한 자신의 모습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렇게 기숙사로 돌아와 밥을 먹었다. 모두들 울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밥만 먹었다. 머릿 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 그대로 기숙사 침대에 몸을 던지곤 페이드 아웃. 정신을 차렸을 땐 세시간 정도 지난 후였다. 

 

 목이 말라 음료수라도 뽑아 마실까하고 밖으로 나왔다가 자판기 앞에서 쿠라모치와 마주쳤다. 눈 밑이 새빨갛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도 엄청 울었지. 쿠라모치는 그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 고개를 휙 돌리곤 물었다.


"잤냐?"

"조금."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미유키는 천천히 지폐를 넣고 음료수를 하나 뽑았다. 덜컹, 하는 소리에 음료수를 꺼내려 허리를 굽히자 등 뒤에서 쿠라모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와무라 녀석, 아직도 방에 돌아오지 않았어."

"뭐?"

"저녁 먹을 때 까진 있었는데..."


 사와무라. 패배의 충격에 완전히 잊고 있었다. 시합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신나 있던 녀석은, 시합이 끝나자 누구보다도 목놓아 울었다. 결국 감독님의 손에 끌려서야 버스에 억지로 태워졌는데, 버스 뒤 쪽은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사와무라의 우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내년이 있는데 선배 앞에서 울지 말라고 소리치던 조노의 고함도 그제야 떠올랐다. 

 시계는 열시가 조금 넘은 때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 연습을 하고 있을리도 없고, 연습실을 제외하면 달리 갈 곳이 있을리도 없었다. 어디에 처박혀서 궁상 떨고 있는거야. 미유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급하게 방향을 틀어 기숙사를 나왔다. 


[경기에서... 이기면.]

[이기면?]

[키, 키스해 주십쇼.]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다. 경기에서 이겼을 때를 전제로 두고 했던 장난같은 내기. 미유키는 저 요구를 들어주고, 천천히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렇게라면 둘 다에게 나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져버렸다. 저 내기의 내용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미유키에게는 이 쪽이 더 나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뭔가 목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그 바보같던 사와무라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기숙사와 그라운드를 누비며 사와무라를 찾아나선지 약 한시간쯤. 미유키는 드디어 녀석을 찾아냈다. 


 사와무라는 여전히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리곤 코를 훌쩍이며 다리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걸까. 미유키와의 내기 내용은 별개로 하더라도 충분히 분했을 것이다. 선발이었으니 더욱 더. 미유키는 천천히 사와무라의 옆에 앉았다. 울고 싶은건 이쪽인데 말이지. 갑작스런 인기척에 사와무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들었다가 미유키와 눈이 마주쳤다. 


"찾았다."

"미유키...?"


 미유키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려는 사와무라를 겨우 반사적으로 잡아 끌어 앉혔다. 그러자 사와무라는 손목을 잡힌 채로 다시 울기 시작했다. 참 서럽게도 운다. 어설픈 위로를 하느니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게 나을 것 같아 미유키는 그저 그대로 사와무라의 옆에 앉아있었다. 그 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졸업 축하드립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졸업식 날이 돌아왔다. 강당에서 다같이 하는 졸업식을 마치고, 야구부에서 준비한 송별회에서 후배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사와무라는 그 날 이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에이스 경쟁에 열을 내고, 야구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진지한 야구바보로. 그리고 지금도 미유키 옆에서 왁자하게 떠들고있다. 연인 관계로 말하자면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오히려 퇴보라고 해야할까. 야구 바보가 되버린 후배는 미유키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손을 잡는것도, 포옹도, 그리고 키스도.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미유키는 그 침묵이 아무래도 불편했다. 이렇게 어물쩡 끝나는건가. 나쁠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결말이었다. 이왕이면 깔끔하게 털고 정리했으면 했으니까.


"선배, 저기요."

"어?"


 한창 송별회가 무르익었을 때, 사와무라가 미유키에게 말을 걸어왔다. 미유키는 순간 잘못 들은건 아닌가하고 멍청하게 되묻고 말았다. 사와무라는 잠시 말을 고르는듯 싶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송별회 끝나고 집에 가기전에, 잠시 시간 좀 내주십쇼."


 올게 왔구나. 미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울다 지친 조노를 하루이치에게 부탁하고, 쿠라모치와 헤어진 미유키는 라커룸으로 향했다. 일부러 이 곳을 고른걸까. 미유키는 처음 사와무라가 고백하던 날이 떠올랐다. 사와무라는 라커룸 안쪽에 기대어 미유키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유키를 보자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후배를 보니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무슨 일이야? 두번째 단추라도 줄까?"

"오, 아직 남아있어요?"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자, 사와무라 역시 가볍게 응수했다. 평소와 같은 사와무라다. 


"가쿠란이 아니라 블레이져니까 별 의미는 없겠지만."

"하하...."

"할 말이 있어서 부른거지?"


 사와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이 아니면 하지 못할 말. 미유키 역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연극은 언젠가 끝이 나야한다. 미유키가 시작했던 이 연극은 오늘로 막이 내린다. 마무리 역시 미유키가 지어야 할 터. 하지만 일방적으로 끝낼 순 없다. 욕을 먹고, 맞더라도 책임은 지고 끝내고 싶었다. 그게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녀석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 선배에게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이 있어서."

"우연이네. 나도 그런데."

"먼저 해도 될까요?"

"응."


 미유키는 기꺼이 순서를 양보했다. 먼저 해서 좋을게 없기도 했고, 사와무라의 말이 궁금하기도했고. 그러나 사와무라의 입에서 나온 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응?"

"미안해요. 그동안 선배를 속였어요."


 그 이야기에 미유키는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이 녀석은 나에게 무엇을 사과하는거지? 당황한 미유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와무라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선배는 절 좋아하지 않는다는거."

"무슨, 무슨소릴..."

"만우절 거짓말."


 사와무라는 만우절 거짓말, 이라고 짧게 말하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선배는 제 고백이 만우절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줬던거죠?"

"너... 그럼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는데... 선배가 날 좋아할리 없을텐데. 그래도 '나도 좋아해'라는 이야길 들은 순간 너무 기뻐서 그만... 욕심을 부려버렸어요."

"사와무라."

"손이 닿을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할 때마다. 선배, 자기가 움찔움찔 했던거 모르고 있었죠? 아무리 제가 바보라도 모를리가 없잖아요."


 미유키는 지금 눈 앞에 있는 녀석이 진짜 사와무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작은 스킨쉽에도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사와무라. 그 행동들이 전부 다 자신을 속였던 것이라니. 눈 앞이 캄캄해졌다. 지금까지 자신이 사와무라를 속이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부 다 반대였던 것이다. 미유키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이제 그만 둬야지, 하면서도 선배가 절 봐주는게 너무 좋아서 계속 끌다가 그만 고시엔 결승전이 되버렸어요. 그 때가 되니까 더 이상 선배를 귀찮게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키스해달라고 했던건데. 그러면 아무리 선배도 그만두자고 하지 않을까해서. 그런데..."

"... 내가 해주겠다고 했지."

"기적이라도 일어난건가 싶었죠. 혹시 정말 선배가 날 좋아하게 된건 아닐까하고."


 그렇게 말하며 사와무라는 쓰게 웃었다. 바보같아. 그렇게 말하는 작은 중얼거림을 미유키는 똑똑히 들었다. 허공에서 시선을 내리자 바닥을 쳐다보고 있는 사와무라가 보였다. 그러다 미유키의 시선을 느꼈는지 사와무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사와무라가 물었다.  


"선배, 결승전에서 이겼다면 정말 키스해 줄 생각이었어요?"

"그럴 생각이었어. 그리고 이제 헤어지자고 하려고했지."

"하하, 진짜 나쁜사람이네."


 사와무라는 울지 않았다. 울보라서 평소라면 펑펑 울고도 남았을텐데, 녀석은 절대 울지 않았다. 미유키는 나쁜 사람이라는 그 말에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냥... 혼란스러웠다. 지금 이 상황이, 그리고 눈 앞에 있는 녀석이.


"사와무라."

"예."

"이걸 굳이 오늘 이야기 하는 이유가 뭐야?"

"... ..."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래, 내가 네 거짓말에 속았다쳐. 하지만 넌 이걸 말하지 않을 수 있었어. 난 오늘로 졸업할테고, 바쁘게 시간을 보내다보면 너와의 관계는 그대로 끝날 수 있었잖아. 난 아무것도 모르고 끝났을거고, 너를 탓하지도 않을텐데."

"그럴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하지만?"

"그러면 선배만 나쁜사람이 되버리잖아요."


 미유키는 그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사와무라는 헤헤, 하고 바보같이 웃으며 미유키를 바라보았다. 아냐, 이게 아냐. 미유키는 오늘 사와무라와 눈물의 이별을 하려고했다. 그리고 훌훌 털어버리곤 새로운 정착지로 향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그렇지만 나도 널 이용했어."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 기뻤으니까 상관 없어요."

"정말 바보구나."

"주변에서 매일같이 들어요."


 할 말이 없었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그건 필시 사와무라도 마찬가지일터. 


"선배는 저에게 '나도 널 좋아한다'는 거짓말을 했고, 저는 그 거짓말을 알면서도 '고맙다'고 이야기했고. 따지고보면 쌤쌤이네요."

"... ..."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너도 죽을상 짓고있는 주제에. 설득력 하나도 없거든?"


 사와무라는 그 말에 억지로 웃어보였다. 그러나 속내까지 감출 순 없었다. 슥 돌아서 라커룸 밖으로 나서려던 녀석은, 잠깐 멈춰 서더니 미유키에게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선배. 졸업 축하해요."


 그리곤 달아나듯 라커룸을 나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미유키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다 끝났다. 연극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결말이 미유키가 원하는 방향대로 끝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정말로 끝났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 한 켠이 아픈걸까. 미유키는 끝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