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P3P/아마햄] 세 계단 위에서

르체 2016. 3. 25. 23:51



 햄코씨, 기억하고 계신가요. 5년전 그 날 말이에요. 오랜만에 한가했던 저녁, 코로마루를 데리고 산책을 가려던 당신에게 제가 용기 내 같이 가겠다고 말했던 그 날. 당신은 제 말에 웃으며 '그럼 점퍼라도 하나 더 입고 올래?'라고 말해 주었지요. 
 그 길로 기숙사 방에 달려 올라가 어떤 옷을 입을 지 고민하느라 침대 위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던걸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나와요. 기숙사에 돌아와 정리하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코로마루와의 산책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기억나는건 당신의 웃음과, 뒷모습과, 종종걸음으로 따라잡아 겨우 보았던 옆모습. 미안, 코로마루. 지금은 옆에서 코 골며 자고 있으니 조금 있다가 잠에서 깨면 간식이라도 하나 더 챙겨줘야겠어요. 새전함 앞에서 나눈 이야기, 기억하고 있을련지 모르겠네요. 전 딱히 점을 믿거나 하진 않지만 그 날만은 그 미신적인 이야기를 고개까지 끄덕이며 열심히 들었어요. 왜냐하면 햄코씨가 이야기 한거니까. 그래서 지금까지도 새전함만은 지나치지 않고 헌금을 하곤 한답니다. 칭찬해 주세요. 그 뒤엔 뭘 했더라... 아, 그래. 내일은 학교에 일찍 가야 한다며 돌아가자고 했지요. 솔직히 말해 아쉬웠어요. 간만에 둘뿐이었는데. (다시 한 번 미안, 코로마루.) 앞장서는 당신의 뒷모습이 야속해 살짝 째려보았어요. 
신사의 돌계단을 내려가는 길, 코로마루는 벌써 저만큼 앞서 내려갔고, 세 계단쯤 밑에 당신이. 그리고 그 뒤에는 내가.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아, 세 계단쯤 차이가 나니까 키가 맞는구나. 당신이 멈춰서 돌아서면, 눈높이가 맞겠구나 하는 생각. 언젠가는 이런 계단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당신보다 훨씬 커져서 위에서 내려다보고 싶다는 생각. 위에서 내려다보는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걸 상상하면서 흐뭇해했던 열 두살의 겨울. 

 이제 저는 그 때의 당신 나이가 됐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고, 그 때 바랐던 것처럼 키도 훨씬 커져서 이제는 당신을 내려다 볼 수 있을것 같아요. 그러니까, 꿈에서라도 나와주면 안될까요, 햄코씨. 
한 번만 더 당신의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