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역전재판

[쿄오도] 잊어버리다. 7

르체 2016. 3. 26. 00:39

 오늘도 법전을 읽었다. 하는 일이 없을 땐 법전을 읽는게 최고라고 생각한다. 공부도 되고, 시간도 잘 지나가고. 하지만 읽고 또 읽어서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진 법전에 질려서 오후부터는 사건 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이것도 꽤나 재미있어서 읽는데 속도가 붙어 금새 두 권을 읽고 말았다. 하지만 앞으로도 다섯 권정도 남았으니 괜찮다. 책장에 두번째 파일을 집어넣고 세번째 파일을 꺼내려고 하는데, 2와 4 사이가 비어있어 손이 그만 멈추고 말았다.

"미누키."
"네?"
"사건 기록 세번째 파일이 없는데, 어디있는지 알아?"

 내 말에 소파에 길게 누워 잡지를 보고 있던 미누키가 다리를 팔랑거리며 말했다.

"아 그거라면 전에 가류 검사님께 빌려드렸는데요."
"가류검사한테?"
"파파의 사건기록 파일이 있으면 좀 보고싶다길래요. 혹시 필요해요? 받아다 줄까요?"
"아니, 괜찮아."

 갑자기 튀어나온 가류 검사의 이름에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이젠 괜찮아 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저녁식사 이후로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그 뒤로 다른 연락은 오지 않았다. 이제 슬슬 그가 없는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불시에 그의 이름이 나왔을 때 멍해지는걸 보면 아직도 멀었나보다. 

 미누키는 괜찮다는 내 말에 시무룩해져서 다시 읽고있던 잡지로 시선을 돌렸고, 나는 그대로 책장 앞에 서서 비어있는 2권과 4권 사이를 망연히 쳐다보다가 4권을 꺼냈다. 안봐도 괜찮겠지. 개별적인 사건 파일이니까 괜찮을거야. 그렇게 생각했건만 비어있는 3권의 자리가 오후 내내 신경쓰였다는건 말할 필요도 없다.




 오후 스테이지를 위해 미누키가 자리를 뜨자, 사무소에는 또 다시 나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 나루호도씨는 요새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사무소에는 전혀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보통 이렇게 혼자가 되면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퇴근을 하는데, 오늘은 다른 일로 마음이 심란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세시간이 넘게 고민하고 있으려니 지친다. 결국 나는 몇 번이나 들었다놨다 했던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이번에야말로 번호를 힘줘서 꾹꾹눌렀다. 

 신호가 가고, 두근거리는 내 심장 소리는 더 커져가고. 받지 않으면 어떡하지. 혹시 일하던 중에 방해하는건 아닐까.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많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조바심이 극에 달해 통화를 끊으려던 찰나,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저기. 저, 접니다. 오도로키 호우스케."

 너무 떨려서 그만 말을 더듬고 말았다. 바보같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오도로키군? 왠일이야?]

  예전엔 내가 먼저 전화를 걸 때마다 좋아해줬는데. 그러니 이런 반응은 참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는 차근차근 통화 목적을 설명했고, 쿄우야씨는 그런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찾아보겠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받아내자 나는 왠지 밀린 숙제를 끝낸 어린 아이의 기분이 되어 가슴을 쓸어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다시 바짝 긴장해야했다.

[저기, 근데 내가 아직 뭐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몰라서 찾는데 오래 걸릴지도 몰라. 급한거라면 네가 와서 찾아보지 않을래?]
"어… 그래도 되나요?"
[응. 그게 더 빠를 것 같고.]

 사실은 전혀 급하지 않은 일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바보같이 아직도 그에게 미련이 많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럼 실례할게요."
 "아냐. 내가 빌렸다고 했는데 일부러 찾아오게 만들어서 미안해."
 "어쩔 수 없는 일인걸요. …아, 아직 일하는 중인가요?"
 "거의 끝났어. 난 신경쓰지 말고 찾아줘."

 오랜만에 만난 그는 조금 수척해져 있었다. 일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걸까. 유리 쇼케이스를 뒤로하고 책장으로 돌아서며 흘리듯 물었다.

"기억은 … 많이 찾았어요?"
"이것저것 열심히 노력은 하고 있어."

 결과는 별로지만. 그렇게 덧붙이며 그가 쓰게 웃었다. 일에 다시 적응하고 처음부터 배우려면 힘들겠다고 말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일 때문에 힘들지는 않아. 다만…"

  쿄우야씨는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서류로 눈을 떨궜다. 무얼 말하려고 했던걸까. 하지만 그 다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일에 집중하고 싶은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방해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다시 책장을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법전과 사건 스크랩파일들. 천천히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찾아보았지만 파일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낑낑대며 내 키보다 높은 책장 위를 올려다 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너와 나는 어떤 사이였어?"
"검사가 생각하기엔 어땠을 것 같아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자 쿄우야씨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하니 짜증이 난 모양이다. 하지만 순순히 대답할 생각은 없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모르고 말이지. 그는 깍지 낀 손을 풀지 않고 거기에 턱을 괸 채로 있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주 친했거나, 반대로 아주 나쁜 사이였을 것 같아."
"너무 범위가 넓지 않아요? 게다가 극과 극인데."
"아니, 오히려 미적지근한 관계는 아니었을 것 같아. 차라리 극과 극이 맞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나는 책 찾기를 그만 두고 그에게로 돌아섰다. 쿄우야씨는 여전히 깍지를 낀 채다. 그리고 조용히 나를 응시한다. 나는 지금까지 우리 관계에 대해 일부러라도 이야기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먼저 나서서 그를 보러 오는 일도 없었고, 부탁하지 않으면 쿄우야씨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일도 드물었다. 하지만 본인이 먼저 이렇게 물어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니까. 

"너는 나를 대하는게 익숙해. 하지만 묘하게 불편해보여."
"그런가요?"
"그래."

 익숙한건 함께 지낸 시간이 기니까 당연한 이야기 일테고. 묘하게 불편해 보인다는건 내가 계속해서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의식해서 그런걸까. 쿄우야씨는 담담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실은 자주 만나고 싶었어. 하지만 네가 불편해 할까봐 그러지 못했고."
"… …"
"너를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 그래서 더 만나고 싶었는데. 근데 넌 아닌것 같아. 그래서 자꾸 혼란스러워. 어느쪽이 맞는걸까."
"음…"
"그리고 넌 왜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걸까."

 그 마지막 말이 가슴을 쿡쿡 찔렀다. 하지만 나는 그 물음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에게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것 역시, 그가 손을 내밀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겁쟁이고 먼저 다가갈 수 없다. 나에게 있어 우리 사이는 그 사실을 전제로 깔고있었다. 

"미안. 이야기 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사실은 우리 사이가 정말 나빴는데 지금 상황이 너무 불쌍해서 억지로 나랑 만나주는 건지도 모르는데말야."
"… …아, 저기. 저 파일이에요."

 나는 끝까지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때마침 눈에 들어온 파일을 가리켰다. 쿄우야씨 뒤에 있던 책장에 꽂혀있던 파일. 그는 그걸 빼서 나에게 건넸다. 

"찾아서 다행이네. 이제 가려고?"
"목적을 달성했으니 가야죠."
"그래. 그럼 잘가. 배웅은 하지 않을게."

 그런거 이젠 바라지도 않는데.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 때,
 
 "오데코."
 "?!??"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놀라 화들짝 뒤돌아보았다. 오데코. 나를 좋아해줬던 그가 불렀던 나의 애칭. 하지만 돌아선 등 뒤에는 책상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쿄우야씨가 있을 뿐이었다.

"왜 그래?"
"아, 아뇨. 뭔가 잘못 들었나봐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젠 그가 보고싶어서 환청이라도 들리나보다. 어질해지려는 머리를 붙잡고 검사실을 나왔다. 또 다시 울음이 나오려고했다. 하지만 오늘도 참았다. 그리고 그가 찾아준 파일을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꽉 쥐고서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