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와] 감기와 토끼사과

글/다이에이 2016. 3. 25. 22:24


 

 찰박찰박, 기분좋은 물 소리에 미유키가 천천히 눈을 떴다. 하얀 천장, 그리고 동시에 눈 앞에 펼쳐지는 기이한 광경에 미유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대야를 방 한가운데다 놓고는 물장난을 치고있던 에이준이 미유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 선배. 일어났어요?"

"뭐야 사와무라. 남의 방에 멋대로."

 

그 말에 에이쥰이 발끈 하려다가 '내가 참는다'하는 얼굴로 바닥에 푹 주저앉았다. 뭐야, 평소같지않게. 좀 더 바보같이 덤벼들 줄 알았는데. 에이준은 그런 미유키의 반응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이마 위에 반접은 수건을 올렸다.

 

"오늘은 환자니까 제가 특별히 참는거에요."

 

 아, 시원하다. 그제야 미유키는 평소같지 않은게 에이준이 아니라 자신이라는걸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였지. 조금만 하고 쉰다는게 연습 분위기가 살벌해 그만 휩쓸리고 말았다. 불펜 투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 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다음이 기억나지 않는다.

 

"저기, 나 어떻게 된거야?"

"기억 안나요? , 남은 이렇게 고생을했는데 하나도 기억을 못한다니 역시 미유키 카즈야!!"

"됐고, 누가 날 데려온건데?"

"진짜 기억 안나는거에요? 불펜연습 끝나고 나오는 길에 쓰러졌잖아요 선배. 마침 제가 옆에서 받아들었기에 망정이지 정말 위기 일발이었다니까요."

"그래그래, 고맙다."

 

 에이준이 칭찬을 바라는 새끼강아지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미유키는 오늘만은 순순히 칭찬해주기로했다. 사실은 받아쳐 놀려줄 기력이 딸리는 것 뿐이었지만.


그나저나, 주장이란 녀석이 꼴사납게 컨디션 조절을 못하고 쓰러지다니. 이래서야 야구부 녀석들을 볼 낯이 없다. 나중에 쿠라모치가 놀릴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온다. 어쨌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미유키는 현재 눈 앞에 닥친 상황부터 정리하기로했다. 물장난을 하는가 싶었더니 수건을 빨기 위해 가져다 놓은거였나. 대야 주변이 물바다인것으로 보아 나중에 청소는 자기 몫이다 싶어 미유키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 있었던거야?"

".... 7시 부턴가?"

 

 그 질문에 에이준이 황망하게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밖에서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걸 보니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닌듯 싶었다.

 

"그래, 어쨌든 오늘은 수고를 끼쳤네. 그럼 이만 가서 자라."

"......"

"?"

"아니, 미유키 입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이상해서..."

"그러니까 반말 쓰지 말라고... 일단은 선배니까."

", 그 말을 들으니 안심임다. 역시 미유키는 미유킴다."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는군. 미유키는 이쯤에서 적당히 대화를 끊으면 알아서 돌아가겠지 싶어서 입을 다물고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머리가 뜨겁게 느껴지는걸보니 역시 내일 연습은 무리려나. 짧은 시간동안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방심한게 문제였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코 닿는 거리에서 에이준이 자기를 멀뚱멀뚱 쳐다보고있는게 아닌가.

 

"야이...!!"

 

 너무 당황해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것 밖엔 하지 못한 미유키에게 에이준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

"안경 끼고 자면 안되요."

"..... 그래, 고맙다."

 

 저 바보 녀석은 어디까지 사람 맘을 들었다 놨다 할 셈인지. 미유키는 평소라면 유연하게 대처하고도 남았을 일에 쩔쩔매는 자신의 한심함에 화가 다 나려고했다. 사와무라 에이준, 내가 다 낫기만해봐라. 그대로 갚아줄테다.

책상위에 비스듬히 안경을 내려놓은 에이준은 답지않게 부지런떨며 다시 한 번 미유키 이마 위에 두었던 수건을 갈아주었다. 역시 아프긴 아픈 모양인지, 기운없는 목소리로 빌빌거리는 미유키를 보고있으니 에이준의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져서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야, 왜 안가."

"역시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까하는데요."

"....?"

"미유키가 빨리 나아야 다시 제 공을 받아줄거 아녜요."

"그런 걱정 안해도 나을테니까."

"아픈 사람답게 어리광도 좀 부려보고 그래보십쇼. 선배는 귀여움이라는게 전혀 없어요."

"너한테 그런소리 듣고 싶진 않거든?"

 

 어쨌건 에이준은 오늘 여기서 자고 가기로 마음먹고 쿠라모치 선배에게 문자를 보냈다. 보내자마자 바로 전화가 와서 당장 내려오라는 큰소리가 났지만 '제가 돌보지 않으면 미유키 선배가 낼 변사체로 발견될지도 모름다.'하고 얼른 끊어버렸다. 다행이도 아까 미유키의 상태를 봐서인지 굳이 윗층으로 달려오지는 않았으나 에이준은 내일 일이 심히 걱정되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미유키는 피식피식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전화를 내려놓은 에이준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러고보니 종합감기약을 가져왔는데."

"뭐야, 그런게 있으면 빨리 내놓으라고."

"빈 속에 먹으면 안된다고해서 말임다. 선배 저녁식사 안했잖아요?"

"....."

"잠깐만 기다려보십쇼."

 

 에이준은 그대로 몸을 틀어 미유키의 간이 냉장고를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어이어이, 남의 냉장고를 그렇게 마구잡이로 뒤지는 녀석이 어디있냐. 그렇게 꿍얼거려보았으나 에이준의 귀에는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 이렇게 쓰잘데기 없는 것만 가득임까. 도무지 도움이 되는게 없... ."

 

 탄산음료라던가, 유통기간이 지나서 딱딱해진 빵, 장기 말 (테츠 상이 넣어둔 모양이다)등을 꺼내던 에이준이 보물이라도 발견한것 처럼 눈을 빛내며 냉장고를 닫았다.

 

"그런거 사다놓은 기억 없는데."

"선배들 중 누가 넣어놓은 거겠죠."

 

 다행이라는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에이준이 과도와 접시를 가지고 침대 앞으로 무릎걸음으로 걸어왔다.

 

"저기, 잠깐만."

"뭠까. 환자는 가만히 계십쇼."

"네가 깎으려고?"

"문제 있어요? 선배가 깎을것도 아니고, 여기에 저 말고 누가 있는데요?"

 

 보고만있어도 불안해지는 광경이란 이런것을 두고 말하는게 아닐까싶다. 어린아이에게 폭탄을 들려놓은 듯한 심정이 되어 미유키는 손사래를쳤다.

 

"안돼안돼안돼, -대 안돼. 나 안먹어. 사과 안먹을거니까 당장 그 칼 내려놔."

"허어....."

 

 에이준은 벙찐 표정으로 미유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보란 듯이 과도를 들어 사과를 두동강냈다.

 

"병자는 병자답게 누워 계십쇼, 미유키 선..?"

"그쪽이야말로 투수라는 자각을 좀 더 가지시죠. 사와무라 후..?"

 

 몸에 열이올라 후끈후끈함이 느껴졌으나 미유키는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병자를 이정도로 피곤하게 하다니. 어지간히도 대단하다 사와무라.

 

"우우... 저 이래뵈도 사과는 잘깎는데."

"전혀 상상이 안되는데."

"이번 기회에 보는건 어때요."

 

 그렇게 말하며 에이준이 스리슬쩍 과도에 손을 댔다. 미유키가 말릴 새도 없이, 에이준의 손이 능수능란하게 사과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반으로 자른 사과를 다시 한 번 자르고, 또 다시 한번 반절로 자르니 먹기 좋은 크기가 된 사과의 껍질을 반쯤 발라내더니 살짝 들어올려 모양을 내기 시작한다. 그 거짓말 같은 광경에 미유키는 잠시 넋을 잃고 그것을 지켜보았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에 착착 감기는 사과의 붉은 껍질과 그 속에 들어있던 하얀 과육. 그리고 곧 이어 짧은 다듬질. 잠시 후 미유키의 앞에 토끼사과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졌다.

 

", 다됐슴다. 사와무라 특제 토끼 사과!"

"손가락은 안베였어?"

"절 도대체 뭘로 보는거에요."

"반푼이 후배?"

"....하여간에, 여튼 먹어 보십쇼. 먹고 약 먹은 다음에 자는거에요."

 

 미유키는 잠시 주저하며 에이준의 눈치를 살폈다. 에이준의 토끼사과라니, 왠지 먹기 아까운데. 에이준은 미유키가 주저하는걸 보더니 또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 독같은건 안넣었다구요."

"아니 그게 아니라."

"."

 

 투덜거리던 에이준은 갑자기 뭔가 깨달은듯 미안한 표정을 짓더니 쏜살같이 찬장으로 달려갔다. 돌아온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것은 작은 포크. 아마도 미유키가 열 때문에 몸 가누기가 힘들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여간에 입이 조용하질 않으니 아프다는걸 자꾸 까먹잖아요. , 아 해 보십쇼."

"? 어어?"

 

 페이스에 휘말려 입을 연 미유키의 입안 가득 시원한 사과 향이 차올랐다. 오물오물 말없이 사과를 먹는 미유키를 보고 있자니 에이준은 왠지 간질간질한 기분이되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참 잘생겼는데 말이지. 저놈의 입이, 입이 문제란말이지. 자기도 모르게 미유키의 얼굴을 빤히 보고있던 에이준은 급하게 다시 정신을 다잡았다.

 

"뭐해?"

"? 아뇨."

"더 줘."

 

 역시 저 인간은 입을 열면 안된다니까. 이왕 이렇게 된거 누릴건 다 누려보자 싶은 속셈이 된 미유키와 얼결에 사과를 먹여주고 있는 에이준의 기묘한 저녁 시간이 흘러갔다.

 

 




 2015.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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