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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점에서
식당에서 점심을 배터지게 먹고도 금새 배가 고파오는건 아마도 한창 성장기이기 때문일것이다. 그런 변명을 앞세우며 에이준은 발걸음도 가볍게 홀로 학교 매점으로 향했다. 같이 있던 친구들에게도 권해봤지만 하루이치는 됐다고 했고, 후루야는 점심밥으로 배가 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여간 근성이 없어 근성이. 그렇게 투덜거리는 에이준을 2층 복도에서 누군가 불러세웠다.
"사와무라, 매점 가냐?"
"아, 넵."
고개를 들어보니 미유키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난 메론빵."
"이런건 스스로 다녀오십쇼! 선배가 다리가 없습니까 팔이 없습니까!"
"핫핫핫, 나 선배라고? 이젠 주장이고?"
"하여간에."
그렇게 말하며 미유키는 받아, 하는 말과 함께 2층 복도에서 동전을 던졌다. 마치 캐치볼을 하듯 가볍게 받아낸 에이준이 손바닥을 확인해보니 500엔 두개가 손바닥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남은건 너 뭐 사먹어라."
"오옷, 미유키 선배가 웬일로?"
"싫으면 빵 다섯개 사오고 거스름돈 천엔 받아오던지."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에이준은 미유키가 더 심술을 부리기 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점으로 향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매점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힘이 강한 자가 빵을 얻을 수 있는 세이도 안의 또 다른 약육강식의 세계. 에이준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자기도 그 세계에 몸을 던졌다.
"질 수 없지."
그러나 야구부에서 단련한 체력으로도 매점의 방어선은 쉽게 뚫을 수 없었다. 중반까지는 꽤 순조로왔으나, 세이코의 떡대를 떠올리게하는 학생들로 이루어진 철벽의 제 1 방어진은 에이준에게 쉽게 파고들 틈을 내주지 않았다. 옆구리 안쪽을 깊게 파고드는 인코스 공략에도, 멀리 돌아가 외각의 빈틈을 노리는 아웃코스 공략에도 방어선은 무너지질 않았다. 남은건 스트레이트 뿐인가. 질끈 아랫입술을 물고 다시 한 번 몸을 던진 에이준은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우당탕 튕겨나왔다.
이대로 빵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점점 줄어드는 시간과, 전혀 무너질 생각이 없어보이는 매점의 방어진을 보면서 에이준은 식은땀을 흘렸다. 손에 쥔 500엔짜리 두개에 땀이 배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데..... 그런 에이준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얹어졌다.
"포기하지마, 사와무라."
"미유키카즈야!"
마운드 밖에서도 그가 이렇게 든든하게 느껴진 적이 있던가. 에이준은 든든한 지원병력의 등장에 그만 눈물이 나려는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매점에 보낸 후배가 어째서 이리도 늦는가. 뭐, 이유는 대충 알 것 같았지만. 남은 점심시간의 끝자락을 느긋하게 보내려고 심부름을 시켰건만 어째 느긋과는 거리가 멀어진것 같다. 그래서 미유키는 돌아오지 않는 후배를 탓하며 의자에서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마도 작년의 자신이 그랬듯 뚫리지 않는 매점 방어선에 좌절하고 있겠지. 그것은 세이도의 1학년이라면 누구나 겪는 경험이니까. 그걸 극복하느냐, 못하느냐. 조금 과장해서 그것에 따라 세이도에서의 남은 2년의 간식 질이 좌우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바보 후배는 어떻게 하고 있으려나.
"....미유키카즈야!"
매점에 도착하니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림이 매점에 펼쳐져 있었다. 왁자하게 카운터를 가득 메우고 있는 덩치들과 거기에 파고들지 못해 진땀빼고 있는 에이준. 미유키는 자기도 모르게 그 모습에 작년의 자신을 대입하고 말았다. 아아, 아즈마선배의 크림빵 심부름에 몇 번이고 덩치들에게 튕겨났던 작년의 청춘이여.
"몇 번이고 다른 방법으로 시도해 봤는데, 도무지 뚫리질 않아서..."
에이준이 답지않게 약한 모습을 보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언제나 당당했던 녀석이, 메론빵을 사지 못했다고 풀죽은 강아지마냥 깨갱하는 모습을 보니 미유키는 기분이 묘해졌다. 야구 이외에는 보통 저런 느낌인가. 아니면 기대에 부흥하지 못했다는 자책? 뭐가 되었든 좋았다. 오늘의 미유키는 왠지 후배녀석을 돕고 싶은 기분이었다. 일년에 한 두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라고. 미유키는 그렇게 말하며 에이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잘 봐, 야구랑 다를게 없어. 상대 타자를 분석하고, 녀석들을 물먹이면 되는거라고. 일단 저 카운터 앞에 득실대고 있는 녀석들, 누군지 알아?"
"모르는데요."
"...축구부 녀석들이야. 우리학교는 전통적으로 야구부가 유명하지만 교장이 몇 년 전부터 다른 체육계 부활동에도 손을 댔거든. 어쨌든 녀석들이 최근 매점을 점거해서 언젠가 한 번 부딪칠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차라리 잘됐어. 이 기회에 손 봐주자."
"어, 어떻게요?"
"말했잖아, 야구랑 똑같다고."
팔 안의 에이준은 야구라는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저 기적저럼 나타난 미유키의 말을 열심히 따를 생각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미유키는 손가락을 들어 분주한 아주머니를 가리켰다.
"봐, 매점 아주머니는 카운터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친 쪽에 있잖아."
"그래서 저도 아까 외곽에서 돌아 들어가려고 했는데, 저 까까머리 녀석이 방해를 해서 막혔어요."
답지않게 나름 머리를 썼는걸. 미유키는 속으로 감탄하며 녀석을 가리켰다.
"저 녀석은 옆구리가 약해. 너 그냥 바깥쪽에서 크게 들어갔지?"
"그걸 어떻게 알고있는거에요?"
"쓰디 쓴 경험의 산물이니 그냥 넘어가자."
"?"
"어쨌든, 녀석을 공략하려면 외곽으로 꽉찬 볼보다는 크로스파이어가 유효하다 이거지."
"바깥에서 안쪽으로?"
"그렇지."
역시 야구 바보. 야구로 설명하니 재깍재깍 알아듣는 에이준이 기특하면서도 한숨이 나오는건 왜일까. 시무룩해졌던 에이준은 미유키의 작전에 금새 기운을 되찾아 언제라도 달려나갈 기세였다. 미유키는 그런 에이준의 어깨를 꾹꾹 눌러 다시 앉혔다.
"왜 말리는거에요? 전 언제라도 나갈 수 있는데!"
"까까머리 녀석은 그렇다 치자, 그 옆에 있는 녀석은 어떡하려고?"
"어...."
"야구랑 축구는 달라. 야구가 일대일이라면 축구는 다대일도 가능하니까. 저 녀석은 분명 네가 까까머리를 제치려고 하는걸 방해할거다."
"그,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하죠..."
"내가 있잖아. 뒤는 나에게 맡겨."
우와, 부끄러운 소리 해버렸다.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미유키는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바보 후배는 그 말에 닭살은 커녕 꽤 감동받은 모양인지 벌린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어이,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그렇게 감동해버리면 곤란하다?"
"꼭 해내고 말겠습니닷! 선배의 메론빵을 위해!"
"그래그래, 그럼 나야 고맙고."
남은 메론빵은 이제 두 개. 개수를 가늠한 순간 축구부 녀석이 다시 하나 가져가버렸다. 그리고 녀석이만족하고 뒤로 빠지는 그 때, 마지막 기회라고 느낀 미유키가 에이준의 등을 떠밀었다.
"사와무라, 고!"
비장하게 출발하는 에이준의 뒷모습은 마치 2사 만루에 번트를 때리고 질주하는 그것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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