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루 홈런

글/다이에이 2016. 3. 25. 23:48



 너무 어이가 없으면 웃음밖에 나지 않는구나. 사와무라는 미유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했다. 크게 날아가 보기좋게 관중석 중간으로 떨어진 미유키의 만루 홈런. 

 홈으로 돌아오는 미유키의 표정은 말할 것도 없이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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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헌터] 신입 헌터의 고난

글/게임 2016. 3. 25. 23:47



 신입 헌터 르체는 멀거니 도기재스가 사라진 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등에 지고있는 칼이 너무 커 자신은 들어갈 수 없는 작은 구멍. 이 굴의 끝이 어디에 이어졌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아아, 또 놓쳤구나. 세 번이나 놓친 끝에 발견한 거였는데 또 놓쳐버렸다. 시간은 이미 마감 시간에 임박했다. 마지막 기회였는데. 결국 써보지도 못한 페인트볼을 굴 속에 마구 쳐넣으며 르체는 울부짖었다. 

 헌터의 길은 험난하고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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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하는 생각

글/다이에이 2016. 3. 25. 23:44


 이전부터 느낀거지만, 가을 이후 감독님의 사와무라 편애가 더 심해진것 같다. 벤치의 나카무라는 그런 생각을 하며 사와무라의 등을 떠미는 감독님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입스라던데, 선발에서 제외하지 않은것만해도 말이 많은 상황에서 계투에 투입까지 하다니. 언제나 믿고 의지하는 감독님이지만 이 상황만은 모두가 납득하기 힘들었다. 

 저녀석, 감독님께 뇌물이라도 먹인거 아냐? 아니면 혹시......... 


 아아, 너무 멀리나갔다. 일단은 지금 시합에 집중, 집중. 선취점은 테이토가 가져갔고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는 상황. 나카무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며 옆에 놓인 메가폰을 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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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자리 세키군] 관심 받고 싶어

글/애니만화 2016. 3. 25. 23:41



 세키는 옆자리의 요코이가 좋았다. 하지만 원체 여자에 대한 면역이 없던 세키인지라, 평범하게 인사를 건넨다거나 장난을 거는것조차 할 수 없었다. 남자애와는 평범하게 장난도치고 이야기도 하는데, 어째서인걸까. 세키는 엎드리는 척 하며 요코이를 슬쩍 훔쳐보았다. 귀보다 살짝 아래로 내려오는 단발머리에 동그란 눈. 어떻게하면 저 아이와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다음 시간인 역사수업은 참 재미가 없어서, 세키는 책 모퉁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페이지를 챠르륵 넘기는 그림으로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다. 한참 끄적끄적 그림을 그리던 세키는 옆얼굴이 따가워짐을 느꼈다. 어? 

"세키군, 수업시간에 딴짓하면 안돼. 주의받는다구."

 그것이 요코이와의 첫 대화. 세키는 이거다 싶었다. 그것이 계기가되어, 세키 속 스위치가 이상한 쪽으로 켜졌다. 

 요코이는 집중력이 부족했다. 산만하다고 해야할까. 옆에서 조금이라도 부시럭거린다 싶으면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처럼 세키에게서 눈을 떼지못했다. 그래서 더욱 딴짓에 몰두했다. 그러면 요코이의 시선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인기를 끌기 위한 세키만의 방식이었다. 누군가가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외모에 신경쓰듯, 몸을 가꾸듯. 덕분에 딴짓의 정도는 날이갈수록 규모가 커져갔다. 주객전도같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코이의 옆자리 세키는 오늘도 수업시간에 딴짓에 몰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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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사와] 조용한 그라운드

글/다이에이 2016. 3. 25. 23:40



 후루야는 조용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같다. 부원들은 열심히 배팅을 하고있고 자신도 열심히 배팅을 하고있다. 불펜엔 카와카미선배가, 그 반대편엔 미유키선배가. 반대편엔 같은학년의 하루이치가 신명나게 나무배트를 휘두르고있었다. 언제나와 같다. 아니, 조금 다르다. 묘한 정적.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하기 그지없다. 누군가는 이 분위기를 마음에 들어할지 몰랐지만 후루야는 싫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않아 귀를 틀어막아야했던 소음. 하지만 이제는 없어서는 안될 소음. 에이준이 없었던 것이다. 


"....저기."

 마음 속으로 하룻치라고 덧붙이며 후루야가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후루야쪽에서 먼저 말을 거는 것이 드물었던지라, 하루이치는 배트를 내려놓으며 조금 놀랐다. 

"무슨 일이야 후루야군?"
".... 없어."
"응?"
"왜... 없어?"

 하루이치는 그제야 후루야가 묻는게 사와무라의 소재임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병원을 다녀오느라 못들었구나. 하루이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집에 일이있어서 일주일쯤 결석한다나봐."
"일주일....."


 야구를 하다보면 금방 가겠지만 왠지 입가가 씁쓸해졌다. 뭐지 이 느낌은. 

후루야 사토루 방년 17세. 사와무라의 부재에 뜻 모를 흉통을 느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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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런] 파트너 체인지

글/게임 2016. 3. 25. 23:39



 코인저울은 불만스럽게 눈을 떴다. 오븐 로비에는 민트초코쿠키가 파프리카 샌드백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정말 말도 못할 정도로 꼴보기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코인저울이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오븐을 나서는 둘의 등을 힘껏 째려봐 주는 것 밖에는.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민트초코쿠키는 언제나 코인저울과 함께 오븐을 나섰다. 코인저울이 알에서 태어났을 때, 가장 먼저 본 것도 민트초코 쿠키였으며 첫 오븐 탈출 역시 그와 함께였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어떻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코인저울은 깊은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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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로지 아틀리에] 비어있는 아틀리에

글/게임 2016. 3. 25. 23:35

 


 다음 날, 에스카는 여느때와 다름 없이 아틀리에로 출근했다. 항상 같은 시간, 같은 풍경들. 홀에서 호문클루스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루실을 지나, 정문 앞에 있는 스레이아와 인사를 했다. 문을 지나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총무과의 솔은 언제나처럼 단정한 얼굴로 아침 일찍부터 미간을 좁히고 서류를 보고있다. 계단을 올라 개발반 사무실로 들어가면 린카와 마리온이 에스카를 반갑게 맞아준다. 둘과 잠깐 담소를 나눈 에스카는 곧장 아틀리에로 향한다. 모든 것이 같다. 공무원의 일상이란 크게 변화가 없는 법이다. 에스카는 버릇처럼 크게 인사를 하며 아틀리에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로ㅈ..."

에스카는 비어있는 아틀리에를 보고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제와는 분명 다른 변화가 있었다. 로지가 없다. 에스카는 천천히 쳐들었던 손을 내렸다. 자연스럽게 아랫입술을 앙다물게 됐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언제나 먼저 출근하는 쪽은 로지였다. 천성이 약간 게으른 에스카와 달리, 로지는 언제나 칼같이 출근 시간을 지켰다. 함께했던 3년, 아니 4년간 에스카는 그가 지각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덕분에 아틀리에가 문을 연 이후로 에스카가 출근 했을 때, 그 곳이 비어있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언제나 연성기나 분해기 앞에 있던 로지가 고개를 들어 '좋은 아침.'이라고 대답해 주는것이 에스카의 변하지 않는 일상이었던 것이다. 

"로지씨."

 가만히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려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꺼진 연성기, 조용한 분해기.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있는 로지의 애독서. 당장이라도 어디선가 로지가 나타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로지는 어제 중앙으로 떠났고, 지금쯤 기구를 타고 있을 테니까. 에스카는 아틀리에의 고요함에 눈물이 나려고했다. 바보, 바보바보. 에스카 메리에, 이 바보. 
 웃으며 로지를 떠나보내고 돌아와 에스카는 밤새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울었다. 그래놓고는 출근하자마자 버릇처럼 로지를 찾는 꼴이라니. 이제는 그에게 의지할 수 없으니 한시라도 빨리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영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로지씨, 보고서의 이 부분 좀 도와주세요!'
'어이어이 에스카, 지난 주에 도와달라고 한 부분이랑 똑같잖아?'
'그치만, 그치만!'

 에스카가 떼를 쓰면 로지는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이번만이야?'하며 도와주곤했다. 그 곤란한 웃음이 좋았다. 그 다정함이 좋았다. 하지만 에스카는 중앙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로지를 잡지 못했다. 따라간다? 아니, 에스카에게 그런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에스카에게는 콜세이트 지부의 일이 있고, 과수원이 있고, 모두가 있으니까. 그것들을 버리고 그를 쫓을 순 없었다. 그것은 로지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지에게 있어 에스카는 언제까지나 '콜세이트의 에스카'로 기억될테니까. 사과와 과자를 좋아하는, 철없는 에스카일테니까. 


그래도 마음은 전할걸 그랬나. 그런 후회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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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실의 냉장고

글/다이에이 2016. 3. 25. 23:02



 냉장고에 언젠가부터 푸딩이 남아 돌게되었다. 매일같이 왕창 먹어대는 성장기 소년이 둘이나 있지만, 매주 다 먹지 못한 푸딩이 세 네개씩 냉장고 구석을 채웠다. 쿠라모치는 그게 싫어서 무리하게 한 번에 몇 개씩 푸딩을 먹곤 했다. 사와무라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언제나처럼 같은 수의 푸딩을 사서 냉장고를 채워두었다. 그것은 5호실만의 약속. 다른 누군가가 들어오기 전까지 계속될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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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와] 만우절 거짓말 4

글/다이에이 2016. 3. 25. 23:00



 미유키가 사와무라를 찾아 낸 곳은 기숙사 건물 뒤, 화단 옆에서였다. 숨죽이고 훌쩍거리는 소리마저 없었다면 찾아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진 밤에 가까운 시간. 항상 연습으로 시끄러웠던 기숙사는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했다. 


 졌다.

고시엔 준우승. 그게 미유키가 3학년 여름, 마지막으로 남긴 성적이었다.


 물론 사와무라를 비롯한 모두는 잘해줬다. 굳이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면 야구의 신이 상대편에 미소 지어줬다고 해야 할 정도로 완벽한 경기였으니까. 평소 이상의 기량을 발휘해 준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역시 진 건 분했다. 앞으로 한 발짝이었는데. 하지만 이상하게도 미유키는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엉엉 우는 와중에, 침착하게 짐을 정리했다. 스스로도 이렇게 침착한 자신의 모습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렇게 기숙사로 돌아와 밥을 먹었다. 모두들 울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밥만 먹었다. 머릿 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 그대로 기숙사 침대에 몸을 던지곤 페이드 아웃. 정신을 차렸을 땐 세시간 정도 지난 후였다. 

 

 목이 말라 음료수라도 뽑아 마실까하고 밖으로 나왔다가 자판기 앞에서 쿠라모치와 마주쳤다. 눈 밑이 새빨갛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도 엄청 울었지. 쿠라모치는 그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 고개를 휙 돌리곤 물었다.


"잤냐?"

"조금."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미유키는 천천히 지폐를 넣고 음료수를 하나 뽑았다. 덜컹, 하는 소리에 음료수를 꺼내려 허리를 굽히자 등 뒤에서 쿠라모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와무라 녀석, 아직도 방에 돌아오지 않았어."

"뭐?"

"저녁 먹을 때 까진 있었는데..."


 사와무라. 패배의 충격에 완전히 잊고 있었다. 시합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신나 있던 녀석은, 시합이 끝나자 누구보다도 목놓아 울었다. 결국 감독님의 손에 끌려서야 버스에 억지로 태워졌는데, 버스 뒤 쪽은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사와무라의 우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내년이 있는데 선배 앞에서 울지 말라고 소리치던 조노의 고함도 그제야 떠올랐다. 

 시계는 열시가 조금 넘은 때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 연습을 하고 있을리도 없고, 연습실을 제외하면 달리 갈 곳이 있을리도 없었다. 어디에 처박혀서 궁상 떨고 있는거야. 미유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급하게 방향을 틀어 기숙사를 나왔다. 


[경기에서... 이기면.]

[이기면?]

[키, 키스해 주십쇼.]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다. 경기에서 이겼을 때를 전제로 두고 했던 장난같은 내기. 미유키는 저 요구를 들어주고, 천천히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렇게라면 둘 다에게 나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져버렸다. 저 내기의 내용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미유키에게는 이 쪽이 더 나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뭔가 목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그 바보같던 사와무라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기숙사와 그라운드를 누비며 사와무라를 찾아나선지 약 한시간쯤. 미유키는 드디어 녀석을 찾아냈다. 


 사와무라는 여전히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리곤 코를 훌쩍이며 다리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걸까. 미유키와의 내기 내용은 별개로 하더라도 충분히 분했을 것이다. 선발이었으니 더욱 더. 미유키는 천천히 사와무라의 옆에 앉았다. 울고 싶은건 이쪽인데 말이지. 갑작스런 인기척에 사와무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들었다가 미유키와 눈이 마주쳤다. 


"찾았다."

"미유키...?"


 미유키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려는 사와무라를 겨우 반사적으로 잡아 끌어 앉혔다. 그러자 사와무라는 손목을 잡힌 채로 다시 울기 시작했다. 참 서럽게도 운다. 어설픈 위로를 하느니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게 나을 것 같아 미유키는 그저 그대로 사와무라의 옆에 앉아있었다. 그 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졸업 축하드립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졸업식 날이 돌아왔다. 강당에서 다같이 하는 졸업식을 마치고, 야구부에서 준비한 송별회에서 후배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사와무라는 그 날 이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에이스 경쟁에 열을 내고, 야구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진지한 야구바보로. 그리고 지금도 미유키 옆에서 왁자하게 떠들고있다. 연인 관계로 말하자면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오히려 퇴보라고 해야할까. 야구 바보가 되버린 후배는 미유키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손을 잡는것도, 포옹도, 그리고 키스도.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미유키는 그 침묵이 아무래도 불편했다. 이렇게 어물쩡 끝나는건가. 나쁠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결말이었다. 이왕이면 깔끔하게 털고 정리했으면 했으니까.


"선배, 저기요."

"어?"


 한창 송별회가 무르익었을 때, 사와무라가 미유키에게 말을 걸어왔다. 미유키는 순간 잘못 들은건 아닌가하고 멍청하게 되묻고 말았다. 사와무라는 잠시 말을 고르는듯 싶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송별회 끝나고 집에 가기전에, 잠시 시간 좀 내주십쇼."


 올게 왔구나. 미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울다 지친 조노를 하루이치에게 부탁하고, 쿠라모치와 헤어진 미유키는 라커룸으로 향했다. 일부러 이 곳을 고른걸까. 미유키는 처음 사와무라가 고백하던 날이 떠올랐다. 사와무라는 라커룸 안쪽에 기대어 미유키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유키를 보자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후배를 보니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무슨 일이야? 두번째 단추라도 줄까?"

"오, 아직 남아있어요?"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자, 사와무라 역시 가볍게 응수했다. 평소와 같은 사와무라다. 


"가쿠란이 아니라 블레이져니까 별 의미는 없겠지만."

"하하...."

"할 말이 있어서 부른거지?"


 사와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이 아니면 하지 못할 말. 미유키 역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연극은 언젠가 끝이 나야한다. 미유키가 시작했던 이 연극은 오늘로 막이 내린다. 마무리 역시 미유키가 지어야 할 터. 하지만 일방적으로 끝낼 순 없다. 욕을 먹고, 맞더라도 책임은 지고 끝내고 싶었다. 그게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녀석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 선배에게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이 있어서."

"우연이네. 나도 그런데."

"먼저 해도 될까요?"

"응."


 미유키는 기꺼이 순서를 양보했다. 먼저 해서 좋을게 없기도 했고, 사와무라의 말이 궁금하기도했고. 그러나 사와무라의 입에서 나온 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응?"

"미안해요. 그동안 선배를 속였어요."


 그 이야기에 미유키는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이 녀석은 나에게 무엇을 사과하는거지? 당황한 미유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와무라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선배는 절 좋아하지 않는다는거."

"무슨, 무슨소릴..."

"만우절 거짓말."


 사와무라는 만우절 거짓말, 이라고 짧게 말하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선배는 제 고백이 만우절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줬던거죠?"

"너... 그럼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는데... 선배가 날 좋아할리 없을텐데. 그래도 '나도 좋아해'라는 이야길 들은 순간 너무 기뻐서 그만... 욕심을 부려버렸어요."

"사와무라."

"손이 닿을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할 때마다. 선배, 자기가 움찔움찔 했던거 모르고 있었죠? 아무리 제가 바보라도 모를리가 없잖아요."


 미유키는 지금 눈 앞에 있는 녀석이 진짜 사와무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작은 스킨쉽에도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사와무라. 그 행동들이 전부 다 자신을 속였던 것이라니. 눈 앞이 캄캄해졌다. 지금까지 자신이 사와무라를 속이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부 다 반대였던 것이다. 미유키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이제 그만 둬야지, 하면서도 선배가 절 봐주는게 너무 좋아서 계속 끌다가 그만 고시엔 결승전이 되버렸어요. 그 때가 되니까 더 이상 선배를 귀찮게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키스해달라고 했던건데. 그러면 아무리 선배도 그만두자고 하지 않을까해서. 그런데..."

"... 내가 해주겠다고 했지."

"기적이라도 일어난건가 싶었죠. 혹시 정말 선배가 날 좋아하게 된건 아닐까하고."


 그렇게 말하며 사와무라는 쓰게 웃었다. 바보같아. 그렇게 말하는 작은 중얼거림을 미유키는 똑똑히 들었다. 허공에서 시선을 내리자 바닥을 쳐다보고 있는 사와무라가 보였다. 그러다 미유키의 시선을 느꼈는지 사와무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사와무라가 물었다.  


"선배, 결승전에서 이겼다면 정말 키스해 줄 생각이었어요?"

"그럴 생각이었어. 그리고 이제 헤어지자고 하려고했지."

"하하, 진짜 나쁜사람이네."


 사와무라는 울지 않았다. 울보라서 평소라면 펑펑 울고도 남았을텐데, 녀석은 절대 울지 않았다. 미유키는 나쁜 사람이라는 그 말에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냥... 혼란스러웠다. 지금 이 상황이, 그리고 눈 앞에 있는 녀석이.


"사와무라."

"예."

"이걸 굳이 오늘 이야기 하는 이유가 뭐야?"

"... ..."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래, 내가 네 거짓말에 속았다쳐. 하지만 넌 이걸 말하지 않을 수 있었어. 난 오늘로 졸업할테고, 바쁘게 시간을 보내다보면 너와의 관계는 그대로 끝날 수 있었잖아. 난 아무것도 모르고 끝났을거고, 너를 탓하지도 않을텐데."

"그럴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하지만?"

"그러면 선배만 나쁜사람이 되버리잖아요."


 미유키는 그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사와무라는 헤헤, 하고 바보같이 웃으며 미유키를 바라보았다. 아냐, 이게 아냐. 미유키는 오늘 사와무라와 눈물의 이별을 하려고했다. 그리고 훌훌 털어버리곤 새로운 정착지로 향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그렇지만 나도 널 이용했어."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 기뻤으니까 상관 없어요."

"정말 바보구나."

"주변에서 매일같이 들어요."


 할 말이 없었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그건 필시 사와무라도 마찬가지일터. 


"선배는 저에게 '나도 널 좋아한다'는 거짓말을 했고, 저는 그 거짓말을 알면서도 '고맙다'고 이야기했고. 따지고보면 쌤쌤이네요."

"... ..."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너도 죽을상 짓고있는 주제에. 설득력 하나도 없거든?"


 사와무라는 그 말에 억지로 웃어보였다. 그러나 속내까지 감출 순 없었다. 슥 돌아서 라커룸 밖으로 나서려던 녀석은, 잠깐 멈춰 서더니 미유키에게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선배. 졸업 축하해요."


 그리곤 달아나듯 라커룸을 나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미유키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다 끝났다. 연극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결말이 미유키가 원하는 방향대로 끝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정말로 끝났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 한 켠이 아픈걸까. 미유키는 끝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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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던지는 쪽이지

글/다이에이 2016. 3. 25. 22:59



"토죠? 토죠 히데아키?"


 그 목소리에 토죠의 발걸음이 멈췄다. 최근에는 들은적 없지만 꽤 익숙한 목소리다. 고개를 돌리자 과연 거기에는 익숙한 얼굴이 서있었다. 시니어 시절의 팀메이트였던 녀석이었다. 세이도로 진학한 이후엔 한번도 만난적 없었는데. 토죠는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았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나야 뭐, 그럭저럭."

"오늘 경기 봤어. 혹시나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다리길 잘했네."

"기다렸어? 나를?"


그 말에 녀석이 배시시 웃었다. 그가 입고 있는 교복은 토죠의 기억에 없었다. 어디로 진학했다고 했더라...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졸업식 때 야구는 계속 할거라고 했었는데 기억에 없는걸 보면 강호 교는 아닌가보다. 정찰 목적으로 나온것 같지도 않고. 토죠는 기다렸다는 말을 곱씹었다. 할 말이 있는걸까. 다음 말을 기다리는 토죠에게, 녀석은 질문을 던졌다.


"이제 공은 던지지 않는 거야?"


 음. 그 질문에 토죠는 난처한 웃음을 띄웠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이 질문을 가을 리그가 시작한 이후로 벌써 다섯번째 받았다. 시니어에서 촉망받던 투수였던 토죠가 세이도의 가을리그에서 등장한 곳은 마운드가 아니라 외야였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에 대해선 충분한 고민을 했고, 투수에 대해 미련이 남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사시키 선배에게는 '투수를 포기하지 말라'는 이야기까지 들었고. 이미 본인 안에선 어느정도 정리가 끝난 이야기지만, 이렇게 간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친구들에게선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었다. 공은 던지지 않는 거야?, 혹은 투수는 그만둔거니? 등등. 


"글쎄, 어떨까."

"어?"

"상대 팀에겐 전력 노출을 할 수는 없잖아?"


 그렇게 말하며 웃자, 녀석은 조금 무안해했다. 음, 오늘도 적당히 잘 대답했다. 그리고 적당히 안부를 주고 받는 사이, 복도 끝쪽에서 곧 버스가 출발한다는 사와무라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안녕. 인사를 마치고 토죠는 서둘러 버스로 향했다. 

 차에 오르자마자 차 깊숙한 안쪽에서 카네마루가 손짓으로 토죠를 불렀다. 그 옆자리 선반에 짐을 올리고 자리를 잡고 앉자, 카네마루가 물어왔다.


"뭐하다 이제 와?"

"응, 시니어때 친구를 좀 만나서."

"허어? 누구?"


 카네마루 역시 토죠와 시니어때 같은 팀 출신이었던지라, 녀석의 이름을 말해주자 카네마루는 아아, 그녀석ㅡ하면서 금새 알아들었다. 잘 지낸대? 그런 질문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곧 버스가 출발하고, 왁자하던 차 내는 금새 조용해졌다. 창 밖을 쳐다보던 토죠가 문득 입을 열었다.


"신지."

"어?"

"녀석이 묻더라고."

"뭐라고?"

"공은 이제 안던질거냐고."


 그 말에 카네마루는 웃음을 터트렸다. 기시감을 느껴서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처음 외야수로 전향한다고 했을 때, 카네마루도 같은 질문을 했으니까. 


"나도 한 질문이지만, 참 바보같다."

"하하."


 카네마루는 쭈욱 기지개를 펴더니 뚜둑 소리 나게 목을 스트레칭 한 후,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자겠다고 말했다. 응, 잘자. 그렇게 말하는 토죠에게 카네마루가 물었다.


"학교 돌아가서도 연습 할거지?"

"응."

"어느 쪽?"


 가끔 카네마루는 참 짖궃다. 오늘 이런 일이 있었는데, 저 질문의 답은 당연히 정해져있지 않은가. 


"당연히 던지는 쪽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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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코선배 이야기

글/다이에이 2016. 3. 25. 22:57





[-홈런, 홈런입니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소리는 매장 안에 비치된 작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던 것이었다. 손님이 없기에 잠깐 졸았나보다. 마스코는 양 뺨을 짝짝 소리나게 때리곤 영수증 정리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야구를 그만둔지 벌써 만 1년이 다되어간다. 가업을 잇기로 결심한건 자신이지만, 그래도 야구에 미련이 가는건 어쩔 수가 없나보다. 마스코는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보았다. 겨우 1년인데, 벌써 손의 굳은 살이 많이 없어졌다. 다른 녀석들은 어떨까.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여기, 계산해주세요."

"아, 예."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자 가게엔 손님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은 가게지만 혼자 보려니 역시 바쁘다. 졸업 후 매일 매일이 이렇게 지나갔다. 야구를 하지 않아도 해가 지고, 새로운 날이 밝았다. 마스코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약 2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지금은 ... 뭐,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가끔 건너건너 야구를 계속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축하해주며, 부러워하기도 하고. 


[9회말, 공격권은ㅡ]

"아, 저기 라디오 채널좀 바꿀 수 있을까?"

"그러세요."


 자주오는 아저씨 손님이 마스코에게 말을 걸어왔다. 마스코는 작은 소형 라디오를 손님에게 내밀었다. 아저씨는 그것을 받아들고 능숙하게 채널을 돌리더니, 이내 곧 어느 채널에서 멈추었다. 


[7회 초입니다. 타자는 세이도의 2학년, 쿠라모치군이군요.]

"엇..."

"그러고보니 마스코군도 세이도 출신이라고 그랬던가?"

"아, 예..."

"요새 가을야구에서 꽤나 잘 나가는 모양이던데. 이번엔 고시엔을 갈지도 모르겠어."

"그러게요."


 마스코는 손님의 이야기에 적당히 맞장구쳤다. 손님의 말이 맞았다. 남은 녀석들이 감독님의 사활을 걸고 죽기 살기로 시합하고 있다고 테츠를 통해 들었으니까. 지난번 경기에는 오랜만에 OB 몇명이 모여 보러 가기도 했고. 마스코는 손님과 함께 작은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쿠라모치 다음엔 코미나토, 4번 타자는 역시 미유키. 그리고 그 다음엔 조노. 물이 오를대로 올랐는지 녀석들은 상대 투수의 공을 깡깡 잘도 쳐댔다. 경기는 그 흐름 그대로 이어가 승리로 끝났다. 손님은 그제야 만족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랑스럽겠어."

"그럼요."    


 마스코는 웃으며 손님이 내민 물건들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바코드를 찍는 일정한 소리가 몇 번 들린 후, 계산을 마치고 손님은 가게를 나갔다. 다시 혼자가 된 마스코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승리의 환호가 라디오 건너편에서 생생하게 전해졌다.

 나도 저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마스코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는 깜짝 놀랐다. 아냐, 아니지. 내 자리는 이제 그라운드가 아니잖아. 한가하니까 자꾸 헛생각이 드나보다. 마스코는 일부러 몸을 일으켜 내일 해도 되는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한없이 우울해질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박스를 다섯개쯤 옮겼을까, 라디오에서 선수 인터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끄는걸 깜빡했다. 전원에 손을 올려놓은 순간, 마스코에게 아주 익숙한 후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의 승리를 감독님과 졸업한 선배님들께 돌립니닷!!!]

 

 그 목소리에 그만 맥이 탁 풀려버렸다. 난 바본가. 질투할게 없어서 후배들의 그라운드를 질투하고말야. 마스코는 그대로 주저 앉아버렸다. 라디오에선 여전히 후배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이번 휴일엔 푸딩을 잔뜩 사서 세이도에 가자. 가서 오랜만에 후배들을 보자.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마스코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깐의 휴식을 끝내고 현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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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와] 만우절 거짓말 3

글/다이에이 2016. 3. 25. 22:57




 미유키는 급변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쓰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대부분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가령, 사와무라의 볼 상태가 급변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고 치자. 그렇다면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구위가 떨어졌나?' 혹은 '컨트롤이 엉망인가?'하는 생각들 일것이다.. '구속이 갑자기 150이 나오기라도 한거야?'하는 생각은 보통 들지 않겠지. 그런 의미의 싫음인 것이다. 그러니 관계의 급변을 좋아할리가. 미유키는 방과 후 자신을 불러낸 후배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매미 소리가 시끄럽게 귀를 울리는 늦여름. 사와무라와 미유키의 관계는 조금 변하려 하고 있었다.


"무슨일이야? 별 일 아니라면 불펜에서..."

"불펜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그래, 그렇겠지. 일부러 자신을 여기까지 불러낸거라면 시시한 이야기가 아닐 터였다. 문득 탈의실 벽에 붙어있는 코시엔 대전표가 눈에 들어왔다. 세이도의 이름을 따라 올라가자 어느 덧 포스터의 맨 윗쪽까지 시선이 따라갔다. 코시엔 결승. 현실감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3일 후, 미유키와 사와무라에게 닥칠 현실이었다. 그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일단은) 애인인 후배로부터의 호출이라. 미유키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와무라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든 고개를 끄덕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찌됐든 지금의 이 상태를 만든건 자신이니까.


"저기, 3일 후의 결승 말인데요."

"응."

"경기에서... 이기면."

"이기면?"


 드물게 우물쭈물하는 사와무라의 귀가 새빨갛다. 미유키는 금방이라도 날아올 것 같은 폭탄을 피하기위해 짧게 심호흡을 했다. 자, 준비는 됐다. 뭐든지 던져보라고.


"키.....스 해 주십쇼."

"....."


 그 말에 미유키는 금방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음, 생각한 것보다는 가벼운 내용이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폭탄이 아닌건 아니지만. 아직까지 여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은 없지만 미유키는 자신을 스트레이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이 연애놀이가 끝나면 언젠가는 여자친구를 사귀고 가정을 꾸릴거라는 막연한 생각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후배의 키스 요청에 자기도 모르게 잠시간 답을 주저했던 것이다.


"...안될까요?"


 조용한 미유키의 반응에 사와무라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얼굴 가득 '역시 말하지 말 걸 그랬어.' 하는 후회가 가득하다. 멍해져있던 미유키는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났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시작한 연극이다. 끝까지 마무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미유키는 손을 뻗어 언제나처럼 사와무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라락하고 손 안에서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다른 손으론 사와무라의 허리께를 살짝 끌어안았다. 이런 스킨쉽은 처음인지라 품 안의 사와무라가 당황하는게 느껴져 왠지 즐거워졌다.


"안 될 이유가 없지."


 아, 난 진짜 지옥에 떨어질거야. 





 경기 날 아침. 사와무라는 그 어느 때보다 컨디션이 좋았다. 특히 요 삼일 간의 컨디션은 세이도에 입학한 이래로 최고라고 꼽을 수 있었다. 적어도 미유키가 보기엔 그랬다. 불펜에서의 공은 평소보다 씽씽 내달렸고, 항상 무르다고 핀잔 주었던 컨트롤마저도 더욱 날카로와졌다. 게다가 오늘의 선발까지. 그야말로 감투에 날개까지 달아준 셈이라고 해야할까. 버스에 오르는 내내 쉴새 없이 조잘거리는 녀석을 보며 미유키는 안심했다. 여느 때와 같은 사와무라다. 작전을 짠다는 핑계로 나란히 옆에 앉아 경기장으로 이동하는 내내, 미유키는 살며시 사와무라의 손을 잡아주었다. 투수의 컨디션을 위해서라면 포수인 미유키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 먹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구장에 나서기 전, 오랜만에 구호를 외쳤다. 오늘 여기서, 우리는 정점에 선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경기에 나가는 아홉과 벤치에 앉아있는 선수들. 그리고 스탠드에서 응원하는 세이도 전원이. 

이 시합만 끝나면 좋든 싫든 미유키는 은퇴하게 된다. 은퇴전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것은 먼 이야기. 지금은 눈 앞의 시합에 집중하기로 했다. 시합은 수비부터 시작된다. 선발인 사와무라와, 주전 포수인 자신. 외야로 달려나가는 동료들의 뒷모습을 보며 사와무라는 꿈쩍도 안하고 있었다. 


"뭐야, 이제와서 긴장한거야?"

"아뇨, 딱히 그런건 아니고."

"그럼 왜?"


 그 질문에 사와무라는 씨익 웃었다. 그리곤 살짝 상기된 얼굴로 미유키에게 말했다. 


"약속, 잊지 마세요."


 그리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마운드까지 펄쩍펄쩍 뛰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미유키는 천천히 배터박스 쪽으로 향했다. 좋으나 싫으나 몇 시간 후에는 닥치게 될 일이다. 그렇다면 후회가 남지 않게 하자. 그 다짐과 동시에 경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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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글/다이에이 2016. 3. 25. 22:55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카페. 크리스는 앞에 놓인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반대편에는 스포츠 신문 기자가 셋. 촉망받는 포수인 크리스를 취재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그들은 간간히 질문을 던졌고, 크리스는 그에 적절한 답을 내놓았다. 옆에 앉아있는 애니멀은 연신 흐뭇한 눈으로 기자들과 크리스를 번갈아 보았다. 


"... 해서, 다음 시즌 목표는 어떻게 되시나요?"

"물론 우승입니다."

"오오."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신문기자들은 퍽 만족한 것 같았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 어느덧 마무리 해야 할 시간이었다. 애니멀은 질문 하나만 더 받겠다고 이야기 하고, 앞에 놓인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맨 오른쪽에 앉아있는 여자 기자에게 마지막 질문을 양보했다. 아직 기자가 된지 얼마 안됐는지, 꽤나 앳되어 보이는 얼굴. 위로 치솟은 눈매가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그녀는 생기발랄한 목소리로 크리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야구를 못하게 된다면 뭘 할 생각이신가요?"

"어이, 이봐."


 옆에 앉아있던 기자들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설마 이런 질문을 할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나보다. 정작 질문을 한 본인은 왜 그러냐는듯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아, 정말 모르는구나. 기자들은 그녀를 대신해 크리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 녀석 신입이라."

"그럴 수도 있죠."


 크리스는 남아있는 커피 한 모금을 후룩 마셨다. 모를 만도 하지. 크리스가 미국 본토로 돌아온지 3년. 일부 사람들은 그의 과거에 대해 모를 수도 있을터였다. 크리스의 과거. 야구를 하지 못했던 공백기에 대해서. 크리스는 천천히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제가 야구를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는 말을 잠시 끊었다. 그리고 꾹꾹 힘을 실어 대답했다.

 

"가장 먼저 일본에 있는 후배를 만나러 갈겁니다. 아, 하지만 이 이야기는 잡지에 싣지 말아주세요."


 인터뷰는 거기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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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를 하지 않는 나

글/다이에이 2016. 3. 25. 22:54



 야구에 미쳐있지만 그래도, 3학년 봄에는 누구라도 한번씩 그런 생각을 하게된다. 야구를 하지 않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마지막 여름이 성큼 다가온 탓이기도하고, 더욱이 주전선발에 옛저녁에 탈락한 이들에게는 더욱 현실적인 문제가된다. 프로, 혹은 대학리그. 최선의 선택지는 그것이지만 그게 가능하다면 애초에 그런 고민을 하고있을리도 없지. 실업야구라는 선택지도있지만 정말 야구른 좋아하지 않고서는 그것 역시 쉽지않은 선택지다. 요컨대, 저 좁디 좁은 야구인의 길을 제외하면 야구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한다는거다. 배트를 내려놓고, 보호구를 벗고 경기장을 뒤로하고 나와야 한다는 것. 


  그야 물론, 기대를 안해본것도 아니었다. 경기장 한 편을 빽빽히 채운 스카우터들을 보면서 혹여나 눈에들지는 않을까, 이번 경기가 끝나고 스포츠 장학생 연락이 오지는 않을까. 하지만 연습경기에도 풀타임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대타에게 그것은 분에 넘치는 소망이었다. 대학생, 혹은 사회인이된다면 더이상 야구를 이유로 부모님께 금전적 도움을 기댈수도 없으니 속은 더 타들어갔다. 



 그냥, 야구가 좋았다. 고향을 뒤로하고 야구유학까지 와서 한 눈 팔지않고 야구만 했는데도 나는 주전조차 될 수 없었다. 당장 이 좁은 세이도 안에서만도 괴물들 투성이였다. 나도 언젠간 저렇게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하며 매일같이 배트를 휘둘렀다. 하지만 슬라임은 드래곤이 될 수 없었다. 나는 언제까지고 3군에서, 그것도 하위타선을 지킬뿐. 너무 허망해서 이젠 눈물도 나지않는다.


 야구를 하지 않는 나는 무엇을 할까.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까. 나는 야구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있을 미래의 내 모습이 잘 상상되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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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와] 만우절 거짓말 2

글/다이에이 2016. 3. 25. 22:53




 농담이라고 해명할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정신을 차려보니 미유키는 사와무라와 사귀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미유키는 동성에게 고백받은건 처음이 아니라 크게 놀라지 않았지만, 사와무라에게는 미유키가 처음, 그러니까 첫사랑인 모양이었다. 풋풋하기도하지. 하지만 풋풋한 첫사랑이 귀엽다고해서 마냥 받아줄 생각은 아니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이쪽은 나름 주장과 주전포수, 거기에 4번타자로서의 막중한 임무로 바쁘다고. 하지만 고백을 받았던 그 날, 사와무라의 웃던 얼굴이 자꾸 아른거려 차마 면전에 대고 '난 농담이었다.'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두달쯤 어울려주다가 이 웃기지도 않는 놀이를 끝낼 생각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럴 생각이었는데.


 파앙, 하고 옆에서 듣기만해도 기분좋은 소리가 났다. 미유키는 자기도 모르게 옆에 앉은 오노를 쳐다보고 말았다. 지금 오노와 배터리를 짜고 있는건 사와무라. 반대편에서 공을 던진 사와무라는 미유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씨익 웃으며 평소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제 공 어때요!"

"요새 컨디션이 좋은데?"


 오노가 공을 돌려주며 그렇게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다. 요새 사와무라의 컨디션은 최고조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유키가 언제나 지적했던 밋밋한 코스도 꽤 날카로워졌고, 구속도 조금씩이긴했지만 꾸준히 늘어갔다.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 사와무라의 컨디션과 가까워지는 대회 일자. 미유키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야구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평소 입버릇처럼 말했고, 실제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사와무라, 오노랑 연습 끝나면 내가 열 구정도 받아줄게."

"오옷, 왠일임까 미유키선배!"

"요새 컨디션 좋잖아? 팍팍 던져보라고."


 그 말에 활짝 웃는 사와무라와 달리, 미유키의 반대편에서 공을 던지던 후루야는 뾰루퉁한 표정이 되었다. 그걸 보는 미유키는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미유키와 사와무라의 연애는 기본적으로 비밀 연애. 그것은 미유키가 제안했고, 사와무라 역시 동의한 바였다. 야구가 전제로 깔려있는 둘이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언제나처럼 연습을 하고,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개인 트레이닝. 거기에 약간의 연애 요소가 가미됐다. 방과 후에 연습 전까지 잠깐 이야기를 한다거나, 혹은 둘 말고는 아무도 오지않은 불펜에서 조심스레 손을 잡아본다거나. 그런 어린애 같은 장난에 오히려 미유키쪽에서 걱정이 될 정도였다. 사귀는 사이인데, 이래도 돼? 그 질문에 사와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도 나도, 야구가 먼저니까 괜찮슴다. 미유키는 그 말에 이 관계를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왠지 가슴 한쪽이 싸해지는걸 느꼈다. 왜였을까. 그 기분을 정의 할 수 있으면 참 좋을텐데. 하지만 당장 문제가 되는건 아니었으므로 미유키는 그것에 대한 생각은 잠시 뒤로 미뤄두었다. 


"헤헷, 제 공에 놀라서 기절해도 몰라요!"

"안해 임마."


 아 그래, 또 하나 달라진게 있다면 녀석의 눈빛. 공을 받아주지 않으면 잡아먹을 것 같이 달려들던 녀석의 눈빛이 조금 부드럽게 변했다. 다른 녀석이 보기엔 여전히 공을 받아달라 떼쓰는 평범한 사와무라겠지만, 미유키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와무라는 변했다. 

 고백을 해서 마음을 전하고, 어린애 장난같은 연애로도 이렇게 사람을 바뀔 수도 있구나. 미트에 차례로 도착하는 공 하나하나가, 그런 사와무라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미유키는 왠지 부끄러워졌다. 


"구속이 늘었네."

"정말요?"


 불펜을 나오며 미유키가 그렇게 말해주자 사와무라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신이 나서 마구 흔들어대는 강아지 꼬리가 눈에 보일 것만 같다. 사와무라는 배시시 웃더니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후루야와 오노는 아직 불펜, 카리바는 뒷 정리. 둘을 보고있는 시선이 없다는걸 확인한 사와무라가 미유키에게 말했다.


"저기 그럼, 칭찬해주십쇼!"

"어?"

"칭! 찬!"


 그렇게 꾹꾹 눌러 말하지 않아도 의도는 잘 알겠는데 말야. 미유키는 순간 당황했다. 굳이 남의 시선이 없는걸 확인하고서 말하는걸 보니, 평소같이 어깨를 두들겨주거나 말로 때우는건 하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애인으로서? 뭘 해줘야 하는거지? 갑자기 난이도가 너무 높아진 탓에 어쩔줄 몰라하는 미유키를보며 사와무라가 짓궃게 웃었다. 


"머리 쓰다듬어 주세요."

"엥?"


 착한 일 한 아이를 칭찬해 주는것도 아니고. 미유키는 사와무라의 말에 일단 팔을 들었지만, 금방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다. 허공에서 움찔움찔 하기를 두어번. 결국 미유키의 손바닥은 재촉에 못이겨 조심스럽게 사와무라의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어."    


 손바닥에 전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미유키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분명 그 나이대의 남자아이 답게 거칠거칠 할 줄 알았는데, 사와무라의 머리카락은 의외로 몹시 부들부들했다. 얼마나 감촉이 좋았는지, 미유키는 자기도 모르게 두어번 더 사와무라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았다. 말 없이 쓰다듬는 미유키의 손길에 사와무라는 꽤나 기분 좋은 듯 키득키득 웃었다.  


"이대로면 에이스도 문제 없을것 같죠?"

"문제 없을지도."

"오, 미유키 선배 오늘 왠지 후한데요? 공도 받아주고, 칭찬도 해주고."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미유키는 한번 더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씨익 웃었다. 그래, 네 컨디션이 계속 이렇게 좋기만 한다면 애인놀이든, 칭찬이든 얼마든지 더 해줄 수 있으니까. 미유키는 그대로 사와무라의 손을 잡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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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와] 만우절 거짓말 1

글/다이에이 2016. 3. 25. 22:52



"미, 미, 미유키 카즈야!"

"이래뵈도 나 선배..."

"좋아함닷!!!"


 4월 1일의 오후. 사와무라가 할 말이 있다는 말에 불려온 미유키는 갑작스레 라커룸에 울려퍼지는 고백에 그만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해버렸다. 아니아니, 당황하면 안되지. 만우절이라는 빌미로 오늘 몇 번이나 당했는데, 바보 후배에게까지 당할 수는 없지. 미유키는 흘러내린 안경을 침착하게 밀어올리며 후배의 고백에 대답했다.


"응, 나도 좋아해."

"...."

"....."


 그리고 이어진 무거운 정적. 둘 뿐이라 참 다행이다. 미유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솔직히 말해봐. 이후의 일은 생각 안했지?"

"....안했어요."


 그러니까 거짓말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지. 감히 이몸에게. 미유키는 팔짱을 끼고 이어질 사와무라의 변명을 기다렸다. 같은 1학년들이랑 게임을 했다가 져서 벌칙이라거나, 아니면 쿠라모치에게 협박을 당했다던가 그런 시덥잖은 이유로 시작한 놀이겠지.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녀석의 전매특허인 '제법인데 미유키카즈야!'같은 류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미유키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후배는 여전히 양 손 주먹을 꽉 쥔 채다.


"사와무라?"

"서, 선배도, 저... 좋아할거라고, 생각 못해서....분명, 거절 당할거라고... 생각해서."


 더듬거리며 말을 잇는 사와무라의 얼굴이 귀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건 이제 막 지기 시작한 노을의 탓이 아닐테다. 라커룸은 동쪽이었고, 설사 서쪽이라 하더라도 사와무라는 창가를 등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사와무라의 얼굴이 빨개진것은 정말 부끄러워서 그렇다는 것. 미유키는 그런 사와무라의 모습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그렇다면 왜 하필 오늘, 이 타이밍에? 


"고마워요."


  미유키는 붉어진 얼굴로 활짝 웃는 사와무라의 모습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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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점에서

글/다이에이 2016. 3. 25. 22:51

 


 식당에서 점심을 배터지게 먹고도 금새 배가 고파오는건 아마도 한창 성장기이기 때문일것이다. 그런 변명을 앞세우며 에이준은 발걸음도 가볍게 홀로 학교 매점으로 향했다. 같이 있던 친구들에게도 권해봤지만 하루이치는 됐다고 했고, 후루야는 점심밥으로 배가 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여간 근성이 없어 근성이. 그렇게 투덜거리는 에이준을 2층 복도에서 누군가 불러세웠다. 


"사와무라, 매점 가냐?"

"아, 넵."


 고개를 들어보니 미유키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난 메론빵."

"이런건 스스로 다녀오십쇼! 선배가 다리가 없습니까 팔이 없습니까!"

"핫핫핫, 나 선배라고? 이젠 주장이고?"

"하여간에."


 그렇게 말하며 미유키는 받아, 하는 말과 함께 2층 복도에서 동전을 던졌다. 마치 캐치볼을 하듯 가볍게 받아낸 에이준이 손바닥을 확인해보니 500엔 두개가 손바닥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남은건 너 뭐 사먹어라."

"오옷, 미유키 선배가 웬일로?"

"싫으면 빵 다섯개 사오고 거스름돈 천엔 받아오던지."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에이준은 미유키가 더 심술을 부리기 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점으로 향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매점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힘이 강한 자가 빵을 얻을 수 있는 세이도 안의 또 다른 약육강식의 세계. 에이준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자기도 그 세계에 몸을 던졌다. 


"질 수 없지."


 그러나 야구부에서 단련한 체력으로도 매점의 방어선은 쉽게 뚫을 수 없었다. 중반까지는 꽤 순조로왔으나, 세이코의 떡대를 떠올리게하는 학생들로 이루어진 철벽의 제 1 방어진은 에이준에게 쉽게 파고들 틈을 내주지 않았다. 옆구리 안쪽을 깊게 파고드는 인코스 공략에도, 멀리 돌아가 외각의 빈틈을 노리는 아웃코스 공략에도 방어선은 무너지질 않았다. 남은건 스트레이트 뿐인가. 질끈 아랫입술을 물고 다시 한 번 몸을 던진 에이준은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우당탕 튕겨나왔다.

 이대로 빵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점점 줄어드는 시간과, 전혀 무너질 생각이 없어보이는 매점의 방어진을 보면서 에이준은 식은땀을 흘렸다. 손에 쥔 500엔짜리 두개에 땀이 배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데..... 그런 에이준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얹어졌다.


"포기하지마, 사와무라."

"미유키카즈야!"


 마운드 밖에서도 그가 이렇게 든든하게 느껴진 적이 있던가. 에이준은 든든한 지원병력의 등장에 그만 눈물이 나려는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매점에 보낸 후배가 어째서 이리도 늦는가. 뭐, 이유는 대충 알 것 같았지만. 남은 점심시간의 끝자락을 느긋하게 보내려고 심부름을 시켰건만 어째 느긋과는 거리가 멀어진것 같다. 그래서 미유키는 돌아오지 않는 후배를 탓하며 의자에서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마도 작년의 자신이 그랬듯 뚫리지 않는 매점 방어선에 좌절하고 있겠지. 그것은 세이도의 1학년이라면 누구나 겪는 경험이니까. 그걸 극복하느냐, 못하느냐. 조금 과장해서 그것에 따라 세이도에서의 남은 2년의 간식 질이 좌우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바보 후배는 어떻게 하고 있으려나. 


"....미유키카즈야!"


 매점에 도착하니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림이 매점에 펼쳐져 있었다. 왁자하게 카운터를 가득 메우고 있는 덩치들과 거기에 파고들지 못해 진땀빼고 있는 에이준. 미유키는 자기도 모르게 그 모습에 작년의 자신을 대입하고 말았다. 아아, 아즈마선배의 크림빵 심부름에 몇 번이고 덩치들에게 튕겨났던 작년의 청춘이여. 


"몇 번이고 다른 방법으로 시도해 봤는데, 도무지 뚫리질 않아서..."


 에이준이 답지않게 약한 모습을 보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언제나 당당했던 녀석이, 메론빵을 사지 못했다고 풀죽은 강아지마냥 깨갱하는 모습을 보니 미유키는 기분이 묘해졌다. 야구 이외에는 보통 저런 느낌인가. 아니면 기대에 부흥하지 못했다는 자책? 뭐가 되었든 좋았다. 오늘의 미유키는 왠지 후배녀석을 돕고 싶은 기분이었다. 일년에 한 두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라고. 미유키는 그렇게 말하며 에이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잘 봐, 야구랑 다를게 없어. 상대 타자를 분석하고, 녀석들을 물먹이면 되는거라고. 일단 저 카운터 앞에 득실대고 있는 녀석들, 누군지 알아?"

"모르는데요."

"...축구부 녀석들이야. 우리학교는 전통적으로 야구부가 유명하지만 교장이 몇 년 전부터 다른 체육계 부활동에도 손을 댔거든. 어쨌든 녀석들이 최근 매점을 점거해서 언젠가 한 번 부딪칠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차라리 잘됐어. 이 기회에 손 봐주자."

"어, 어떻게요?"

"말했잖아, 야구랑 똑같다고."


 팔 안의 에이준은 야구라는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저 기적저럼 나타난 미유키의 말을 열심히 따를 생각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미유키는 손가락을 들어 분주한 아주머니를 가리켰다.


"봐, 매점 아주머니는 카운터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친 쪽에 있잖아."

"그래서 저도 아까 외곽에서 돌아 들어가려고 했는데, 저 까까머리 녀석이 방해를 해서 막혔어요."


 답지않게 나름 머리를 썼는걸. 미유키는 속으로 감탄하며 녀석을 가리켰다. 


"저 녀석은 옆구리가 약해. 너 그냥 바깥쪽에서 크게 들어갔지?"

"그걸 어떻게 알고있는거에요?"

"쓰디 쓴 경험의 산물이니 그냥 넘어가자."

"?"

"어쨌든, 녀석을 공략하려면 외곽으로 꽉찬 볼보다는 크로스파이어가 유효하다 이거지."

"바깥에서 안쪽으로?"

"그렇지."


 역시 야구 바보. 야구로 설명하니 재깍재깍 알아듣는 에이준이 기특하면서도 한숨이 나오는건 왜일까. 시무룩해졌던 에이준은 미유키의 작전에 금새 기운을 되찾아 언제라도 달려나갈 기세였다. 미유키는 그런 에이준의 어깨를 꾹꾹 눌러 다시 앉혔다.


"왜 말리는거에요? 전 언제라도 나갈 수 있는데!"

"까까머리 녀석은 그렇다 치자, 그 옆에 있는 녀석은 어떡하려고?"

"어...."

"야구랑 축구는 달라. 야구가 일대일이라면 축구는 다대일도 가능하니까. 저 녀석은 분명 네가 까까머리를 제치려고 하는걸 방해할거다."

"그,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하죠..."

"내가 있잖아. 뒤는 나에게 맡겨."


 우와, 부끄러운 소리 해버렸다.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미유키는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바보 후배는 그 말에 닭살은 커녕 꽤 감동받은 모양인지 벌린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어이,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그렇게 감동해버리면 곤란하다?"

"꼭 해내고 말겠습니닷! 선배의 메론빵을 위해!"

"그래그래, 그럼 나야 고맙고."


 남은 메론빵은 이제 두 개. 개수를 가늠한 순간 축구부 녀석이 다시 하나 가져가버렸다. 그리고 녀석이만족하고 뒤로 빠지는 그 때, 마지막 기회라고 느낀 미유키가 에이준의 등을 떠밀었다.


"사와무라, 고!"


 비장하게 출발하는 에이준의 뒷모습은 마치 2사 만루에 번트를 때리고 질주하는 그것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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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와] 비 오는 날

글/다이에이 2016. 3. 25. 22:50


 예고 없이 비가 오기 시작했다. 토독 톡 떨어지는 일정한 리듬의 빗방울 소리를 따라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면서 미유키는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보니 비가 금방 그칠 것 같지 않다. 이래서야 오늘 야외 배팅 연습은 무리겠네. 실내 그라운드에서 할 연습 스케쥴을 다시 짤까. 제법 주장다운 생각을 하고있는 미유키의 눈에 와-하고 스탠드로 달려가는 1학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체육수업을 나왔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후퇴하는 모양이다. 


"와하하하하! 비 따위가 나를 멈춰세울 수 없지!"

"멍청아, 그만 돌아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에이준이 운동장 한복판에 서서 허리에 손을 얹고 크게 웃고 있었다. 바보아냐,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미유키의 손가락이 멈췄다. 다음주에 있을 시합의 선발이 어떻게되도 상관없는 모양이지. 미유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에이준은 크게 뒤로 세 발짝 뛰고는 활짝 웃으며 얼굴을 들었다. 


"다음 선발은 접니다 선배!!!!!!!"


 눈이 마주쳤다. 저녀석, 설마 이걸 노리고? 황당해하는 미유키를 뒤로하고 에이준은 달려나온 카네마루의 손에 붙잡혀 스탠드로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그걸 끝으로 운동장의 소음은 빗소리에 잠기고말았다. 미유키의 손가락이 다시 빗방울의 리듬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ㅡ보, 그런다고 선발에 써줄것같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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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와] 난 단거 싫어해

글/다이에이 2016. 3. 25. 22:49



 화이트데이. 다섯글자만으로도 설레이는 연인들의 이벤트. 에이준은 조심스럽게 가판대 앞에 섰다. 푸딩을 사러 다녀온다는 핑계로 나온 잡화점의 가판대는 알록달록한 사탕으로 가득했다. 미유키가 무슨 맛을 좋아하는지는 모른다. 에이준은 무작정 언젠가 맛있다고 생각했던 사탕 다섯개를 한 손에 움켜지고 누가 볼새라 도망쳐 돌아왔다. 그 일이 어제. 그리고 오늘, 화이트데이 당일 방과 후. 에이준은 비장한 마음으로 2학년 B반 교실을 찾았다. 미유키가 조금 늦을 거라는 이야기를 쿠라모치에게 듣고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며 세 계단씩 성큼성큼 딛고 올라가 도착한 B반 앞. 기세좋게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혼자일 줄 알았던 미유키에게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미유키군! 이거 받아줘!"


  한 3초만 더 늦었어도 큰일날 뻔 했다. 고백의 순간에 눈치없에 등장한 후배가 되는건 아닌가 싶어 벌렁벌렁한 가슴을 누르며 에이준은 벽에 밀착했다. 아아 역시, 그럼 그렇지. 미유키는 잘생겼으니까, 고백 받아도 이상할게 없지. 에이준은 새삼 손에 쥔 사탕이 부끄러워졌다. 귀여움이라곤 단 한구석도 없는 야구부 후배와 귀여운 동급생의 고백. 보나마나 결과가 뻔했다. 시무룩해진 에이준이 벽에서 떨어졌던 그 때.


"미안."


 미안하다는 감정이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미유키가 그렇게 말했다.


"난 단거 싫어해."


 그 말에 에이준은 다시금 손에 쥐고 있는 사탕을 바라보았다. 단걸 싫어한다고? 그야 물론 미유키가 단 걸 먹는걸 단 한번도 본적이 없긴 했다. 시합 때 긴장을 풀기위해 선배들이 이따금씩 껌이나 사탕을 입에 물고 있을때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었지.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더 이상했다. 어떡하지, 이 사탕 어떡하면 좋지. 


 탁탁탁 뛰는 소리가 나더니 뒷문이 열리고 여학생이 뛰쳐나왔다. 얼굴 한 쪽을 가리고 금새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에이준은 그 여학생에게서 왠지 모를 유대감을 느꼈다. 여학생의 손에는 예쁜 포장지의 사탕이 들려있었다. 그 여학생의 사탕도,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사탕도. 목적지는 같았지만 결국 그 손에 들어가는 일은 없겠지. 에이준은 복잡한 기분으로 돌아섰다. 사탕은 친구들이랑 나눠먹고 연습이나 해야지. 그렇게 돌아서는 에이준을 누군가 불러세웠다.


"어이, 사와무라."

"....?!"

"2학년 교실까지 무슨 일이야?"

"어, 어떻게 제가 여기 있는걸 알았어요?"


 어느새 뒷문 가까이 미유키가 다가와있었다. 여학생을 바라보느라 그가 다가오는걸 모르고 있었나보다. 언제나처럼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미유키는 에이준의 머리를 푹 눌렀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이 머리는 누구거게요~?"

"이익, 그만 하십쇼!"

"오, 사탕."


 손을 쳐낸다는게 그만 사탕을 흩뿌리고 말았다. 사방으로 날아가는 사탕 중에 하나를 미유키가 재주 좋게 받아냈다. 바보같은 실수를 저지른 에이준은 얼굴이 새빨개져 떨어진 사탕을 회수하기에 바빴다. 다 줍고, 남은건 미유키 손에 들려있는 하나. 


"나 주는거야?"

"선배는 단거 싫어하잖아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작아지고 말았다. 여전히 귀 끝이 뜨겁다. 미유키는 에이준의 그 말에 호오, 하더니 조심스럽게 사탕의 포장을 벗겼다. 바스락 바스락 하는 소리가 나고, 곧 초록색의 동그란 알사탕이 미유키의 손바닥에 미끌어졌다. 메론 맛이려나, 아니면 사과? 


"응, 난 단거 싫어해."

"그, 그러면...."


 돌려주세요. 그 말을 하려는 순간, 미유키가 사탕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그래도 네가 주는건 받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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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라사와] 바움쿠헨 엔딩

글/다이에이 2016. 3. 25. 22:49

 

 같은 반이었던 친구와, 같은 기숙사실을 썼던 후배가 결혼을 했다.

 

 쿠라모치는 식탁 위에 작고 귀여운 상자와 새하얀 청첩장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목을 죄어오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제꼈다. 나처럼 이렇게 정장이 어울리지 않는 녀석도 없을거야. 쿠라모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비웃었다. 뒷풀이의 끝의 끝까지 달렸더니 시간은 이미 자정이 훌쩍 넘어있었다. 내일도 훈련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기분이 정말 엿같아서, 바로 몇 시간 전까지 배터지게 마셨던 술을 좀 더 마시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쿠라모치는 거칠게 냉장고를 열었다. 생수 몇 통과 단백질 파우더만 들어있는 냉장고는 그의 기대에 부흥해주지 못했다. , 다시 나가기는 귀찮은데.

 

 너무 필요이상으로 오버한 것 아닐까. 쿠라모치는 그 날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아마 료상은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 감이 좋으니까. 미유키에게 사회를 부탁 받았을 때는 이걸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진심으로 고민했지만, 처음 한 것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거기에 임하는 자신의 마음가짐였지.

 

'모치선배가 주례를 맡아주는거에요?!'

'멍청아, 주례가 아니라 사회.'

 

 자신이 사회를 맡게 됐다고 이야기 했을 때, 환하게 웃었던 후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필 이런때 떠올라버리다니. 쿠라모치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구겨져버리고 말았다. 역시 편의점을 가서라도 술을 사와야겠다. 그렇게나 마셨던 알콜은 쿠라모치의 정신을 전혀 흐트러뜨리지 못했다. 쿠라모치에게는 지금 알콜이 진심으로 더 많이 필요했다. 오늘을 잊기 위해서 필요했다. 누구보다도 행복한 웃음을 지었던 후배, 그리고 그 옆에 서있던 망할 친구놈. 그 둘을 축하해주는 야구부 선후배들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사회를 보았던 나. 그 어느것 하나 마음에 드는게 없었다.


 편의점 한 구석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술병들을 보면서, 쿠라모치는 자연스럽게 어느 한 브랜드에 눈이 갔다. 후배와 제일 처음 마셨던 술이다. 성년이 되자마자 술집으로 끌고가서, 어른의 맛을 보여 주겠다며 웃어대며 녀석의 입에 들이부었던 술. 왜 그랬을까, 쿠라모치는 그 때의 자신이 지독하게 싫었다. 알싸하게 취한 후배에게 생각지도 못하게 속마음을 듣게 되었던 그 날.

 

'선배, 모치선배.'

'뭐야, 취했냐?'

', 미유키가 좋슴다.'

 

 후배의 폭탄같은 고백에 들고 있던 잔을 떨어트린게 기억났다. 덕분에 그 날 바지가 다 젖어버렸지. 망할 자식. 쿠라모치는 욕을 하면서도 그 술을 몇 캔 집어들었다.

 

 좋아했다. 정말로 좋아했다. 언젠가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너의 뒤를 쫓고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너의 뒤를 쫓듯, 너역시 친구의 뒤를 쫓고있었다. 투수와 포수니까 그런거겠지. 필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버텨왔던 나에게 너의 고백은 너무도 충격이어서, 순간 표정관리고 뭐고 잊어버렸다.

 

'...많이 취했다 너.'

'역시 이상하죠? 남자랑 남자인데.'

 

 그럼 나도 이상한거겠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하지못했다.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었던 그 때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싶었더니 어느새 지금의 자신도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있었다.

야구로치면 콜드게임이려나. 마음 한조각도 전하지 못한채, 쿠라모치의 짝사랑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후배녀석은 그 이후로 스스럼없이 자신을 찾아와서는 남의 속도모르고 주절주절 이야기해댔다.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지만 쿠라모치는 그 이야기를 끈기있게 들어주었다. 친구의 이야기를 하는 후배의 얼굴은 막 사랑을 시작한 소녀처럼 반짝반짝 빛나서, 그저 보고만있어도 좋았다. 자신의 것이 아니여도, 그렇게 빛나는게 참 좋았다. 사실 녀석의 그런 모습에 반했으니까.

 

', 이번 시즌이 끝나면 미유키에게 고백할까해요.'

 

 작년이었던가, 드디어 올게왔구나 싶었다. 친구녀석은 프로로 진출해 승승장구를 달리고있었고, 오랜 친구로서 옆에서 봐온 결과 녀석도 후배를 좋아했다. 눈앞에 뻔한 결과가 그려졌지만, 눈치없는 후배는 자기가 차이기라도 할까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럼 차이면 나한테 와.'

'...?'

'술이라도 사줄테니까.'

 

 순간 당황했던 후배는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마구 화를 내기 시작했었다. 그런 후배를 놀리며 나는 남은 마음을 정리했다. 꼭꼭 눌러서,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처박아놓았다. 다시는 그 마음을 풀어놓아서는 안된다는 다짐과 함께.

 

 술을 내려놓고 티비를 켰다. 식장에 가기 바로 전까지 야구경기를 보고 있다 나가서, 자연스럽게 스포츠채널이 켜졌다. 심야인지라 지난 경기들의 리플레이들이 흘러나오고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지금 이순간 제일 보고싶지않았던 친구의 지난 시즌 결승경기였다. 저 관중들 어디서엔가 후배가 보고있었겠지. 술을 들이키는 입이 씁쓸했다. 저 경기가 끝나고, 고백을 했겠지. 그리고 고백의 결과는 쿠라모치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않았다. 다음에 둘을 보게 됐을 때, 후배는 친구의 손을 잡고 누구보다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으니까.

속이 쓰렸다. 역시 안주없이 몇 캔째 술을 마시니 제 아무리 쿠라모치라도 속이 안쓰릴 수가 없었다. 같이 뭐 좀 사올걸 그랬나. 일없이 주방을 훑던 쿠라모치의 눈이 식탁 위의 하얀 상자에 멈췄다. 식장에 왔던 모두에게 나눠 주었던 바움쿠헨. 요새 젊은 커플들의 결혼식에선 이런걸 하객들에게 주는게 유행이라나 뭐라나. 쿠라모치는 천천히 그것에 손을 뻗었다. 상자 속에는 적당한 크기의 바움쿠헨이 들어있었다. 보기만해도 입가가 달아지는 초코시럽을 듬뿍 끼얹은 바움쿠헨. 친구는 단 것을 싫어했으니 후배가 고른거려나. 쿠라모치는 과도를 가져와 크게 사등분했다. 그리고 한 조각을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잘 구워진 바움쿠헨이 입 속에서 바스러졌다. 한입, 또 한입. 달다, 정말 달다. 기계적으로 그것을 삼키자 왜인지 눈물이 나왔다. 그러나 닦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줄어드는 바움쿠헨의 크기만큼, 후배를 향했던 자신의 마음이 사라지는 것 같아 가슴이 아렸다.

 

 좋아했다. 정말로 좋아했었다. 너를 보면 행복했고, 친구와 잘 된 너를 보면서도 행복했었다. 마음을 접어 꼭꼭 숨겨두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바보같다. 바보 멍청이, 쿠라모치 요이치.

 

"......"

 

 목이 메였다. 그러나 손이 멈추지 않았다. 입 안 가득 바움쿠헨을 씹으면서, 쿠라모치는 목놓아 엉엉 울고말았다. 이제는 좋아했던 후배의 행복밖에 바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억울하고 슬퍼서, 그래서 그는 밤새 바움쿠헨을 먹으며 울고 또 울었다.

 

바움쿠헨 따위, 정말싫다. 두 번 다시 먹나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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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맨 AU

글/다이에이 2016. 3. 25. 22:47

 

"불렀어요?"

 

 에이준이 품에 강아지를 안고 문을 두들겼다. 그의 방문에 미유키는 보고 있던 신문을 옆 테이블에 내려놓고, 에이준에게 자신의 반대편 자리를 권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에이준은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푹 앉았다. 아차, 저번에 크리스 선배가 앉기 전에 물어봐야 한다고 해야 했던것 같은데. 살짝 눈치를보니 미유키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크게 상관 없으려나. 낑낑대는 강아지를 벽난로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모습을 보며 미유키가 물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컸네."

"그쵸? 사랑을 듬뿍듬뿍 줘서 키우고 있으니까요."

"강아지 이름이 뭐랬지?"

"유우임다."

"유명 탤런트 이시다 유우의 유우?"

"타키가와 크리스 유우의 유우거든요!"

 

 그것도 모르냐는 얼굴로 에이준이 새침하게 말하자 미유키는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로 사부의 이름을 강아지한테 붙이는 사람이 어디있냐. 미유키가 그렇게 놀리자 에이준은 양 뺨 가득 바람을 넣어 부풀렸다.

 

"그 쪽이랑 상관 없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왜 부른거에요?"

"마지막 시험을 치려고."

 

 그 말에 에이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후루야와 자신, 후보자가 단 둘만 남은 상황에서 언젠가 닥칠거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갑자기일줄은 몰랐다. 아마 벽 반대편에서도 후루야는 같은 상황이지 않을까.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가 났다. 미유키는 수트의 안주머니에있는 홀스터에서 소형 권총을 꺼내 장난스럽게 에이준을 살짝 겨누었다가, 손잡이를 빙글 돌려 건넸다.

 

"받아."

 

 두근두근. 총이 무서운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훈련으로 많이 익숙해졌으니까. 무서운 것은 지금의 상황. 에이준은 미유키가 다음 순간 자신에게 무엇을 시킬지 궁금하고, 또 무서웠다.

 

"이걸로, 유우를 쏴."

"?"

"난 두번은 안말하는데."

 

 미유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에이준이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같았다. 대신 반대편에 앉은 에이준의 손에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벽난로 앞에 얌전히 앉아있는 유우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커다란 눈으로 에이준만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엔 시끄럽고 난동부리던 녀석이, 이상하게 지금 이순간만 조용했다. 총알이 자신의 머리를 꿰뚫을걸 알고 있기라도 한걸까. 에이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슬쩍 미유키를 바라보자 그는 가볍게 어깨를 들썩 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에이준은 그의 말대로 해야 했다. 지난 몇 개월간 정을 붙이고, 존경하는 사부의 이름을 붙여서 동거동락했던 강아지를 단지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쏴야 했던 것이다.

 

"저는........"

"."

 

 총을 쥔 왼손을 들어올렸다. 총구는 정확히 유우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검지에 걸린 방아쇠만 당기면, 벽난로 주변은 피투성이가 될테고 자신은 시험을 통과해 당당하게 크리스와 어깨를 겨줄 수 있게 될 것이다. 15, 아니 5초면 충분할것이다. 그것만 견디면 된다. 에이준은 눈을 꽉 감았다.

 

"........죄송합니다. 못하겠어요."

"그래, 넌 그정도의 남자구나."

 

 동시에 벽 반대편에서 탕,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그걸로 결정 됐다. 에이준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고, 후루야는 통과했다.

 

"짐싸서 집으로 돌아가."

 

 미유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준은 크게 심호흡을 하곤 벽난로 앞에서 떨고있는 유우를 안아들었다. 잘 한걸까? 아니,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에이준이 잘한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험도 통과하지 못했고, 기대해줬던 사부에게 아무런 보답도 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면서도, 이상하게 품 안에 안겨있는 유우의 체온에 왠지 안심이 됐다. 일단 짐을 챙겨서 집으로 가자. 집에가서 한숨 잔 후에, 사부님에게 할 말을 생각해보자. 아니, 이제 앞으로 만날 수 있긴 한건가?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괴담, 세이도 야구부 - 해결편 1

글/다이에이 2016. 3. 25. 22:45


"아냐, 어쩌다보니 이렇게 잘 맞아떨어진 것 뿐이지 그게 꼭 주장에게 닥칠거라곤..."

 

 하루이치가 사와무라를 진정시키려는 듯 어깨를 잡아 눌렀으나 사와무라에겐 이미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흥분한 사와무라의 머릿 속에서 저 일련의 시련이 앞으로 미유키에게 닥칠 것이라 이미 확정 지어진 듯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미유키를 지킨다!!"

"....?"

"어째서 그런 결론이...?"

"그보다 네 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까 기분이 이상한데."

 

 이상한 곳에서 스위치가 들어간 사와무라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뺀 하루이치의 뒤로 후루야가 응응, 하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는게 보였다. 카네마루는 그런 둘을 보면서 한숨을 쉬고, 토죠는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뭐 조심해서 나쁠건 없지.'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어쨌든 시간은 늦었고, 이 방에 남은건 내일이 오프임에도 변함없이 연습을 할 야구바보들 뿐인지라 하루이치는 이제 그만 자자며 손전등을 껐다.

 

 다음 날, 평소보다 조금 늦잠을 자버린 사와무라는 허겁지겁 일어나 후루야를 깨웠다. 사와무라가 후루야를 깨운 건, 방에 다른 세 녀석이 없었기 때문이기도했다. 후루야까지 없었다면 아마 어제의 그 괴담회가 거짓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깨끗하게 치워진 방. 사와무라는 소름이 오소소 돋는걸 느끼며 자고있는 후루야의 어깨를 계속해서 흔들었다. 결국 일어나지 않는 후루야의 품에서 곰인형을 빼앗고서야 둘은 방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아침 식사시간보다 조금 늦었는지, 선배들이 우르르 식당 밖으로 나오고 있는게 보였다. 그 무리에 있던 마에조노가 멀뚱히 서있는 둘을 발견하곤 멀리서 말을 걸었다.

 

", 둘이서 왠일로 같이 있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슴다."

"밥 얼마 안남았으니까 빨리 먹어라. , 쿠라모치가 너 찾는거 같던데?"

 

 같은 방에 있으니 딱히 찾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만나질텐데 무슨 일이지. 사와무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미리 와있던 하루이치와 카네마루가 손을 들어 둘을 반겼다. 저 녀석들은 의리도없게 먼저 가버릴건 뭐야. 후루야는 하루이치에게 할 말이 있는지 그 쪽으로 가버렸고, 사와무라는 항상 하는 그대로 자신의 지정석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는데,

 

없다.

지정석이 없다.

 

 지정석이 없는게 무슨 말인가하면, 평소 사와무라의 식당에서 앉는 지정석은 미유키의 옆자리인 것이다. 그러니 지정석이 없다는건 식당에 미유키가 없다는 것과 같았다. 평소라면 먼저 가버렸나~ 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어제 하루이치에게 들었던 괴담이 사와무라의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는 것이었다. 그 때, 부들부들 떨며 식판을 들고 이리저리 헤매는 사와무라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 사와무라. 이리 좀 와봐."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거기엔 쿠라모치가 있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마에조노가 쿠라모치가 자길 찾고 있다고 그랬었지. 사와무라는 그 어느 때보다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쿠라모치의 옆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보니 쿠라모치의 옆에서 밥을 먹는건 처음인 것 같다.

 

"선배, 어제 저 없이 잘 주무셨슴까? 역시 남의 방은 불편하죠?"

"너야말로 우리 방에서 뭘한거야 임마."

"깨끗이 치웠으니까 문제 없지 않슴까."

"니가 치운것도 아니면서."

 

 쿠라모치는 툴툴거리면서 반쯤 남은 밥을 크게 한숟갈 입에 퍼넣었다.

 

"그러고보니 왜 오라 그런검까?"

"네놈이 미유키 찾느라 얼빠진 표정짓고 있는게 못나보여서 그랬지."

"얼빠진 표정 지은 적 없슴다!!"

"지금도 얼빠진 표정인데 뭐."

 

 사와무라가 씩씩대면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쿠라모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캬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오프 날의 식당은 확실히 한적했다. 통학파인 사람들 중에는 아예 등교를 하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 같았고, 기숙사에 거주중인 사람 중에는 간만의 휴일이니 밖으로 나가서 끼니를 해결하려고 식당에 들르지 않은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았다.

 

"너 오후에 미유키랑 피칭 연습 할거지?"

"물론임다."

"이번 주말엔 못하지 않을까."

"? 그게 무슨 소림까."

"미유키녀석, 오늘 집에 간다 그랬거든."

 

 순간 컥, 하고 사레가 들렸다. 가슴을 두들기는 못난 후배에게 쿠라모치는 친절하게도 물을 가져다주었다. 물 한잔을 다 마시고 두번째 잔의 반을 담숨에 비운 사와무라가 숨을 돌리자마자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임까!"

"무슨말이긴, 오프니까 집에 갈 수도 있는거지."

"아니 그치만...."

 

 사와무라가 알고있는 미유키는 오프에도 집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와무라가 알고있는 미유키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을테지. 쿠라모치는 턱을 괴고 간만에 진지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간만에 아버지에게 보고라도 하러 간게 아닐까."

"흐음....그럴 수도 있겠네요."

 

 사와무라가 그렇게 말하자 쿠라모치는 심각해지지 말라며 사와무라의 머리를 사정없이 흐트려놓았다.

 

"그리고 여기서 미유키 놈의 전언."

"? 유언이요?"

"멍청아, 전언. 전언 몰라?"

 

 심각한 분위기를 단번에 무너트리는 사와무라의 발언에 쿠라모치가 짜증을 냈다. 게다가 유언이란 말에 반대편 테이블에 있던 후루야가 달려왔다. 뒤에서 간절하게 부르는 하루이치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으나 후루야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미유키 선배의 유언..."

"그러니까 유언이 아니라니까! 하여간 이 바보들을 어떡하면 좋냐 진짜!"

"어떡하냐 후루야, 우리가 손을 쓰기도 전해 미유키가 당해버렸나봐..."

 

 사와무라의 말에 후루야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쿠라모치는 더 이상 태클을 걸 기력도 없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둘 다한테 해당되는 말이니까 한 번만 말한다. '내가 없는 동안 오버워크 하지 말 것.' 이게 미유키 놈의 전언이다."

"그게 담까?"

"그래. 어차피 말해도 듣질 않겠지만 일단은 말해두라고..."

"어떻게 우리만 생각할 수가 있슴까... 적어도 죽기 직전만이라도 자기를 생각하라고 미유키 카즈야...."

".. 오버워크 ... 안하기... 유언."

", 이제 지친다 진짜....."

 

 쿠라모치는 하루이치에게 뒷 일을 맡겨버리곤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울상이 된 둘을 식사가 끝나자마자 하루이치가 구슬려서 일으켜 세웠다.

 

"야 후루야, 이제 우리 공은 누가 받지...? 오노선배?"

"...카리바?"

"그게 아니야 둘 다. 주장은 그냥 외출 나간것 뿐이라구."

 

 결국 그 날은 오노 선배도, 카리바도 연습에 나타나지 않아 둘은 타이어를 매달고 주구장창 런닝밖에 할 수 없었다. '오버워크는 하지 말 것. '그 말을 지키기위해 체간 운동도 하지 않았다. 후루야와 사와무라는 하루이치의 노력 끝에 결국 그것이 유언이 아닌 단순한 전언이었다는건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불길한 느낌까지 사라지는건 아니었다.

 

"안되겠어, 오늘 밤은 작전 회의다."

"...작전 회의?"

 

 시합도 아닌데?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후루야에게 사와무라가 가슴을 팍 쳤다.

 

"이런 중요한 시국에 주장이 빠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구. 미리 대책을 세워놔야지!"

 

 후루야는 그 말에 왠지 감동한 듯한 표정이 되었다. 하루이치는 그런 둘을 보며 저 회의에 같이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지만, 자긴 할만큼 했다고 생각했는지 목욕 후 둘에게 이별을 고했다.

 

", 그럼 둘이 작전 회의 열심히 해."

"우왓 하룻치, 저런 배신자! 넌 세이도의 미래가 걱정되지도 않냐!"

"적어도 쓸데없는 걱정은 안한다고 생각해..."

 

 그리곤 뒤도 안돌아보고 방으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사와무라는 한껏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후루야를 데리고 5호실로 돌아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TV를 보고있던 쿠라모치가 돌아보다가 사와무라 뒤에 따라들어오는 후루야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얜 또 왜 데려와? 아침부터 철썩같이 붙어 다니더니, 둘이 사귀냐?"

"무슨 그런 무서운 농담을. 저희는 지금 세이도의 안녕을 위한 동맹관계를 구축중이라구요."

"네가 그런 어려운 말을 쓰는것 보니 어딘가 단단히 아픈 모양이구만..."

"그런고로 후루야는 오늘 여기서 자고 갈검다! 어차피 마스코선배 침대 비어있잖슴까!"

"나야 뭐 상관 없다만."

 

 게임할래? 그렇게 물었지만 둘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엉뚱한 녀석들이 또 무슨 일을 벌일까 싶어 쿠라모치는 게임을 하는 척하며 힐끗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미유키에게 부탁 받은 것도 있고 해서 틈틈히 지켜본 결과 오버워크는 하지 않은 모양인데, 대신 남아도는 에너지로 쓸데없는 일을 벌이는건 아닌가하는 걱정이 들었다. 저 녀석들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아아, 세이도의 투수진의 미래가 걱정되어 미칠 것 같다. 탄바선배, 돌아와 주세요.

사와무라와 후루야는 나름 심각했다. 노트를 펼쳐놓고 어제 하루이치가 말했던 괴담의 포인트를 일렬로 주욱 적어내린 후, 마지막에는 미유키 카즈야라는 이름을 적어냈다. 역시 너무 똑같아...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겹치는 단서가 너무 많다. 그리고 오늘, 연습에 나오지 않은 부분. 사와무라는 이것이 시작이라며 볼펜으로 톡톡 두들겼다.

 

"애초에 그 이야기의 시작이 주장이 연습에 나오지 않은 것부터였잖아?"

"...하지만 오늘은 오프잖아."

", 네 말이 맞아. 일단 주말엔 지켜보는거야. 그리고 월요일에도 안나오면..."

 

 주말엔 지켜볼 것. 사와무라가 그렇게 날려쓰자, 후루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장이 연습을 나오지 않음, 그 밑에 적혀있는 아픈 주장이라는 글자를 후루야가 가리켰다.

 

"아프지 않는지... 지켜봐야해."

"그러게, 그거 중요하지. 내일 몇시쯤에 오지? 쿠라모치 선배, 낼 미유키 선배 몇 시에 오는지 암까?"

"내가 그딴걸 어떻게 아냐. 그보다, 뭘 하고 있는거야."

 

 결국 쿠라모치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와무라의 침대 위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선배도 암까? 세이도 야구부괴담."

"? 그게 뭔데?"

"코시엔에 6년째 나가지 못해 자살한 주장의 이야김다..."

"아아, 그건가."

 

 쿠라모치는 사와무라의 말에 작년 여름을 떠올렸다. 그래, 작년 이맘때쯤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 것 같다. 그 때 뭣도 모르고 2학년들 방에 따라갔다가 밤새 괴담이야기를 했었지 ... 쿠라모치는 괴담보다는 손전등을 얼굴 밑에 대고 무표정을 짓고 있는 료스케의 모습이 더 무서웠던걸로 기억했다. 그 때의 료상은 정말 무서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쿠라모치에게 사와무라가 말했다.

 

"그 때는 아직 5년차이지 않았음까. 이번에야 말로 정확히 똑같다구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야 도대체."

"4번타자, 주전포수, 주장. 6년째 여름 코시엔 진출 실패.... 딱 미유키카즈야 이야기지 않슴까!"

"......... ."

"그래서 저희는 결심했슴다. 우리라도 나서서 미유키카즈야를 지켜주자고."

 

 이 바보녀석들, 정말 그걸 믿고 있는건가. 쿠라모치는 아침의 피로가 다시 몰려오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전날 저녁 열심히 계획을 짜고 잤던 사와무라와 후루야는 의욕 넘치게 그라운드로 향했다. 오늘도 오프지만, 그래도 오후엔 미유키가 오겠지. 오자마자 상태를 확인해주겠다. 그런 의기양양한 상태였다. 후루야도 기합이 빡 들어갔는지 오라를 풍기며 그라운드를 뛰어다녔다. 그런 상태는 저녁 식사때까지 계속되어, 둘은 식당에 누가 들어올 때마다 그것이 미유키가 아닌지 빡세게 확인했다.

 

"오오 미유키 카즈야....가 아니네."

"...."

"내일 아침에 오려나."

"글쎄."

 

 저 바보 녀석들은 지치지도 않네, 쿠라모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국 저녁식사가 끝날 때까지 미유키는 안경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허탈해진 둘은 하루이치까지 합세해 목욕탕으로 향했다. 노곤노곤 하루의 피로를 뜨거운 물에 녹여내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카네마루가 들어왔다.

 

"사와무라, 후루야. 오늘 하루종일 주장 찾지 않았냐?"

"왔어?"

"방금 욕탕 밖에서 마주쳤는데...., 어디가!"

"가자!!!"

"....!"

 

 물기를 말리는 둥 마는둥 하고 둘은 서둘러 미유키의 방으로 달려갔다. 쿵쾅대며 계단을 올라가 선배들에게 욕을 얻어먹었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중요한건 미유키의 안위! 미유키의 방 앞에 도착한 둘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까지만해도 불이 꺼져 있었는데, 이제는 창살 사이로 환하게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이틀 내내 기다렸던 미유키가 돌아온 것이다. 사와무라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쾅쾅 두들겼다.

 

"미유키!!! 미유키선배!!! 주장!!! 문 좀 열어보십쇼!!! 접니다! 세이도의 에이스를 노리는 남자, 사와무라 사와무라입니다!!"

 

 방 안에서 뭐야아, 하는 늘어진 미유키의 목소리가 났다. 다행이다, 죽지 않고 무사히 기숙사에 돌아와줬어. 감격의 눈빛을 나누는 둘 사이로 쾅하고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이렇게 시끄럽게."

"........"

".... 마스크...?"

 

이틀만에 얼굴을 보는 미유키는 찌뿌둥한 얼굴에 감기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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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세이도 야구부 - 문제편

글/다이에이 2016. 3. 25. 22:43


 

 전통있는 학교에는 으레 그렇듯, 세이도에도 7대 미스터리라던가 괴소문들이 여러가지 있었다. 목 없는 여학생이 연주하는 피아노라던가,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한 명씩 사라지는 교우들 이야기라던가.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쌓여있는 사와무라는 자연스럽게 그것들에 대해서 들을 기회가 많았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사와무라는 '하하, 그런 것 따위 다 헛소문이지 뭐.'하고 능청을 떨었지만 실상은 무서워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랬다. 사와무라 사와무라는 괴담에 약했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가 여름 밤마다 들려주던 귀신들의 이야기는 어김없이 꿈에 나왔고, 사와무라는 밤새 그것들에게 쫓기며 시달렸다. 지어낸 이야기임을 알지만서도 무서운걸 어쩌랴.


때문에 사와무라에게 지금 상황은 굉장히 불편하고 꺼림칙했다.

 


".... 그래서말야, 12시가 지나면 배트를 휘두르는 귀신이 나타나는데.."

 

 하룻치는 어떻게 저런 천연덕 스러운 얼굴로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걸까. 오늘따라 유난히 눈을 가린 앞머리가 길어보이는건 내 착각일까. 손전등은 왜 얼굴 밑에 대고 있는거야. 사와무라는 울고싶은 심정이었다.

어느 늦은 여름 밤, 쿠라모치가 자리를 비운 5호실에 하루이치와 후루야가 놀러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판기 앞에서 멍때리고 있는 후루야를 하루이치가 데려온거지만. 내일이 오프인지라 쿠라모치가 미유키의 방에서 밤새고 올거라고 했기에 베개도 가지고왔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오늘 5호실에서 1학년 궐기대회가있대.'라고 이상하게 소문이 부풀려져서, 저녁식사 후 5호실에는 1학년들로 만원이었다. 먹고, 마시고(물론 음료수), 까불고 놀다보니 시간은 어느 덧 자정에 가까워져 하나 둘 돌아가기 시작해 결국 남은건 처음 왔던 하루이치와 후루야. 그리고 토죠와 카네마루, 방 주인 사와무라. 이렇게 다섯이었다.

 

"너희도 자고가게?"

"? 안되냐?"

"아니아니, 사람은 많을 수록 좋지."

 

 환상적인 실력의 1p플레이어 하루이치와, 보고있는 것조차 괴로워지는 실력의 2p플레이어 후루야의 카트대결을 구경하다 잠자리로 들어간게 새벽 세시. 불을 끄고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5호실의 한가운데에 누워있던 하루이치가 갑자기 툭 말을 던졌다.

 

"....그런데말야, 혹시 그거 알아?"

 

사와무라의 동물적 감이 '어서 하루이치의 입을 막아!!'하고 외치고 있었으나 이미 하루이치는 이야기를 시작한 후였다.

 

"세이도 야구부 괴담."

 

그것은 여러종류의 괴담을 귀가 닳도록 들었던 사와무라도 들어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결국 방에 굴러다니던 손전등이 켜지고, 하루이치를 중심으로 둥글게 앉은 1학년 다섯명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지대한 관심에 하루이치는 처음엔 얼굴을 붉혔지만 곧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형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히익, 형님이?"

"시끄러워 사와무라."

 

이야기의 출처가 료스케라니, 괴담에 한층 더 공포가 실렸다.

 

"20년 전, 야구부가 코시엔에 6년 연속 가지 못한 때가 있었대. 그 때는 도쿄에서 세이도가 야구 원탑이었던 때라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기자며 팬들이며 꽤나 분노했던 모양이야. 당연히 4번타자이자 주장이었던 선수에겐 큰 부담이었고.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심하게 내려앉고, 매일 같이 늦게까지 남아서 연습을 계속하는데... 오버워크라고 다들 말렸는데도 계속한 모양이야. 그렇게 두 달이 흘렀지... 그러다 결국 일이 터졌어."

 

 꿀꺽하고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5호실은 하루이치가 이야기하는 소리를 제외하면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사와무라는 뒤집어쓴 이불을 더욱 힘 줘 잡았다.

 

"어느 날 아침, 주장이 연습에 나오질 않는거야. 그 동안의 오버워크가 누적이 되서 크게 앓아누운거지. 당시 여름 본선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졌던 감독은 주장을 크게 혼냈고, 팀원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왔어. 그리고 그날 밤."

 

 그날 밤, 하루이치는 그 말에 꾹꾹 힘을 줬다. 그 귀신같은 타이밍에 이야기를 끊고 하루이치가 주변에 앉아있던 친구들을 스윽 둘러보았다. 이불에 가려 얼굴이 잘 보이진 않지만 부들부들 떨고있는 사와무라, 그 옆에서 식은땀 한줄기 흘리고있는 카네마루. 흥미진진한 표정의 토죠와 드물게 또랑또랑한 눈을 하고 있는 후루야. 각기다른 네 명의 표정을 확인한 하루이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야구용구실에 비품을 가지러갔던 매니저의 비명이 터져나왔어."

"히익."

"그래서? 주장이 설마?"

"책임감을 이기지 못한 주장이 결국 자살을 한거야."

"으아아아아!"

"사와무라군이랑 후루야군이 타이어 끌 때 쓰는 그 튼튼한 끈 있지? 그걸로 목을 세 번 빙빙 돌려서 가장 윗쪽의 선반에 매달고 얼굴엔 자기가 즐겨쓰던 포수 마스크를 쓰고선...."

"그만해 하룻치이이이!!!!"

"새파랗게 질려서 눈은 하얗게 까뒤집어져서는..."

"그만하라고 했잖아아아아!!"

"이렇게 팟!하고!!!!"

 

 하루이치가 손전등을 다시 얼굴 밑에 가져다댔다. 기다란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왼쪽 눈동자를 하얗게 뜬 하루이치가 손전등을 껐다 켜자, 이불 안쪽에서 사와무라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그 뒤부터 야구부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

"아직 안끝난거야....?"

 

 무서운건 사와무라뿐만이 아니었는지, 카네마루도 간절한 얼굴이 되어 하루이치를 바라보았다. 그 질문에 하루이치는 그저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을 뿐.

 

"새벽 한시에, 늦게까지 남아서 연습하던 에이스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기숙사로 달려온거야. 그리곤 말을 더듬으면서 '주장이, 주장이!!!!'이 말만 반복하더래."

"으으으...."

"배팅 존에 죽은 주장이 연습하고 있다면서, 계속해서 구령 붙이는 소리가 난다는거야. 하나, . 하나, ..... 몇 시간이고 계속. 처음엔 에이스도 부원 중 하나가 열심히 연습을 하나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그 목소리는 한번도 쉬지를 않는거야. 단 한번도. 이상하게 생각해서 에이스가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죽은 주장의 목소리가 들렸던거지."

"하룻치, 제발 그만해줘.....제발."

"에이스가 자기도 모르게 '주장...?'하고 물어봤더니."

"..봤더니?"

"그 목소리가 뚝 끊기더라는거지. 하지만 계속해서 배트 휘두르는 소리가 나더래. 에이스는 너무 무서워져서 차마 안까지는 확인하지 못하고 기숙사로 달려온거고."

 

 이제 토죠만이 하루이치에게 바싹 다가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사와무라는 침대에서 훌쩍거린지 오래고, 카네마루도 한계치를 넘었는지 양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물론 그런다고해서 안들리지는 않는것 같았지만. 후루야는 쿠라모치가 경품으로 타온 곰인형을 끌어안고 벽을 보고 돌아앉아있었다. 하루이치는 이런 친구들의 반응이 썩 맘에 들었는지,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몰입해서 더욱 이야기를 풀어냈다.

 

"소문은 입에서 입을 타고 커졌대. 그리고 그와 더불어 여기저기서 주장을 봤다는 제보자가 속출했고. 이를테면 비가 오는 늦은 밤, 남아서 정리를 하던 야구부원이 야구용구실에서 자기 머리 위에서 덜렁덜렁 거리는 주장의 발을 봤다는 이야기라던가. 미팅실에서 한 밤중에 티비가 팟 하고 켜지더니 코시엔에 진출하지 못했던 해의 마지막 경기가 몇 시간이고 이어진다던가. , 주장은 살아생전 치킨마요맛 주먹밥을 제일 좋아했는데 매니저들이 주장이 죽은 이후로는 그 맛을 만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저녁 간식시간에 치킨마요맛 주먹밥이 수십개씩 나오는 일도 있었고."

"....치킨마요."

"결국 사건은 당시의 감독과 부원 전체가 주장의 무덤에 가서 사과하는 걸로 무마됐대. 다음 해에는 다시 코시엔에 나가게 됐고."

"해결되긴 한거구나."

". 그 뒤로는 주장을 봤다는 사람도 없었어..... 하지만 잊을만하면 그 주장의 귀신이 나타난대. 언제 나타나냐면..."

"코미나토, 이제 그만 해라."

 

 카네마루가 거의 울상이 되서 하루이치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정도로 이야기를 끝낼 하루이치가 아니었다.

 

"이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건 좀 그렇지만, 주장의 귀신이 나타나는건 코시엔행이 좌절됐을 때라고 해. 그것도 6년 주기로말이지."

"잠깐, 잠깐만 하룻치."

 

 그 때까지 훌쩍이기만 하던 사와무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커다란 황금 빛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사와무라 뿐만이 아니라, 카네마루도, 토죠도, 그리고 돌아앉은 후루야도 같았다. 하루이치를 제외한 넷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4번 타자."

"주장."

"6년 째 좌절된 코시엔행."

"...포수."

 

 네 사람이 차례로 키워드를 뱉어냈다. 그리고 그 네 가지 단서가 가리키는건, 사와무라가 아는 한 세이도 야구부에 단 한사람 밖에 없었다.

 

"미유키 카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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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와] 긴장을 풀어주는 방법

글/다이에이 2016. 3. 25. 22:40


"뭘 그리 보고있냐."

 

 체간 트레이닝을 마치고 나오던 쿠라모치가 미팅실에서 미유키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말을 붙였다. 세이도의 1군답게, 쿠라모치도 미유키도 오프날인 오늘을 트레이닝에 반납했다. 그건 이미 숨쉬듯 자연스러운 일이라 그리 놀랍지않았다. 놀라운건 미유키의 행동. 미유키는 웬일로 미팅실에 혼자 앉아 히죽대며 시합 비디오를 돌려보고 있었다. 보통은 화면을 씹어먹을 듯 진지한 표정으로 경기를 보곤 했는데 별일이네. 저 녀석이 저런 표정을 짓는건 왠지 뒤가 구린데.

 

"아아, 지난 연습 경기를 좀 보고있었어."

 

 화면엔 지난 달에 있었던 연습시합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그러고보니 급한 일로 빠져서 이 시합은 못봤던 것 같은데. 선발은 노리, 포수는 미야우치. 쿠라모치는 미유키의 흥미를 끈게 무엇일까하고 같이 경기를 보기시작했다.


 경기는 4회 말, 세이도가 수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코어는 1-3으로 밀리는 중. 뭐하는거야, 쿠라모치가 짜증스럽게 말하자 화면 속 마운드에 모여있던 세이도 부원 몇이 갑자기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미야우치 선배가 언제나하는 그걸 하고있나봐."

"그거?"

"그래, 그거."

 

 쿠라모치의 표정이 싸하게 식었다. 쿠라모치는 미야우치 선배와 그다지 함께 시합을 한적이 없었지만, 그의 버릇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있었다. 미야우치가 시합을 하기만하면 그날 저녁 식당에서 듣기 싫어도 귀에 들어오는 투수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하는 방법,

 

[서, 선배!!! 이거 성희롱이에요!!!!!!]

 

 아, 또 해버린건가. 쿠라모치는 화면 속 마운드에 서있는 노리가 몹시 불쌍해졌다. 제 딴에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당하는 쪽이나 보는 쪽은 성희롱이라고밖엔 생각되지않는 해괴망측한 방법이 아닐 수없다. 쯧쯧, 혀를 차던 쿠라모치의 시선이 방글방글 웃고있는 미유키에게 닿았다. 저 녀석, 설마!

 

"오호, 정말 효과가 있는가보네."

", 미유키."

"?"

"혹시나, 정말 혹시나해서 하는 말이지만."

 

 쿠라모치의 머리 속에 급하게 투수진의 얼굴이 지나갔다. 설마 동급생인데다 유리멘탈인 노리에게 할 배짱은 없을테고, 남은건 후루야와 사와무라. 그리고 어째서인지 소거법에의해 최종 후보에 남는건 사와무라였다.

 

", 사와무라한테 저 짓하면 죽인다."

", 그치만.."

"죽인다."

"때에 따라서는..."

"죽여버릴거야."

 

 단호하게 말을 자른 쿠라모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기숙사로 향했다. 지금 당장 돌아가서 5호실에서 혼자 굴러다니고 있을 후배에게 "안돼요, 싫어요, 하지마세요." 이 말부터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실제 상황에서 얼마나 효과가 있겠냐만은 적어도 그 소리를 듣고 내가 달려갈 수 있지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쿠라모치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다른녀석은 몰라도 내가 녀석의 룸메이트 선배인 이상 그런 행위는 절대 용납못한다, 미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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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와] 관찰

글/다이에이 2016. 3. 25. 22:39


 너를 관찰해본다. 투수가 아닌 너를 관찰해보았다. 언제나 밝고, 천진난만하게 웃고, 사람들에게 둘러쌓인 너. 그런 너에게 포수가 아닌 나는 무엇일까. 애초에 존재하기는 하는걸까. 그런 불안감에 잠시 걱정해 보았지만, 곧 그만두기로했다. 


 너에게 고교 삼년은 야구로 가득 차있을테니 아직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너의 삼년 중에서 두 해는 나로 가득 채워줄테니까. 다른 생각따윈 절대로 들지않게 내 생각만하게 하게 할거니까. 그리고 남은 일년은 나를 그리워하며, 먼저 떠난 내 등뒤만을 바라보게 만들고 잊을만하면 한번씩 뒤를 돌아 손을 잡아줘야지. 아, 너무도 완벽한 계획이다.  나는 이제 막 스코어북을 완성한듯한 기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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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사와] 사와무라가 없는 날

글/다이에이 2016. 3. 25. 22:38


 

 세수 하는데 양치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밥 먹는데도 아무 방해가 없었고, 심지어 하교를 하는 길 역시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하루가 아닌가. 그 완벽한 하루의 일과에 크리스는 위화감을 느꼈다. , 틀려먹었다. 일상에 시끄러움이 없어졌다고 위화감을 느끼게 되 버리다니. 크리스는 비어있는 에이준의 신발장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올 거면 얼른 돌아와라 사와무라. 조금 시끄러운 것 정도는 봐 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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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와] 18.44m

글/다이에이 2016. 3. 25. 22:37

"선배, 혹시 그거 알아요?"

"뭔데."

 

 한가로운 평일 밤. 오후 연습을 마치고 목욕까지 끝낸 후인지라 조금 나른해진 기분이 들기도 했다. 미유키는 마치 자신의 방인 것마냥 바닥에서 뒹굴대는 후배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역시 목욕을 마친지 얼마 안되었던 지라 머리에 물기가 촉촉한 후배님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책을 읽고 있었다. 타이틀은 '야구의 역사.'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미유키가 선반에서 타월을 꺼내 사와무라에게 던졌다.

 

"머리나 제대로 말려. 감기든다."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에요. 선배, 마운드랑 포수의 거리가 18.44미터인건 알아요?"

"..... 너 지금까지 몰랐어?"

"지금 막 알게 됐거든요. 18.44미터... 이야, 좋은 울림인데요."

 

 사와무라가 눈을 반짝이며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18.44미터. 마음에 들었는지 몇 번이고 중얼거리는 사와무라를 보며 미유키가 바싹 다가가 앉았다. 던졌던 타월은 머리에 얹힌 그대로다. 그렇게나 잔소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마 당분간은 스스로 물기를 털 것 같지 않다. 드라이기는 옆 방에서 빌려갔으니 손으로 털어주는 수 밖에 없겠네.

 

"이제라도 알게 되서 다행이네. 뭐 그런다고 해서 갑자기 제구가 나아진다거나 할 것 같진 않지만."

"하여간에 말하는 거 하곤.... 지식은 유용한 무기니까 꼭 도움이 될거에요!"

"너한테 그런 말을 들어도 그닥 실감이 나지 않아서."

 

 미유키가 그렇게 말하며 타월에 손을 얹었다. 천천히 물기를 탈탈 털어주는 손길에 사와무라는 기분 좋은 듯 눈을 감았다. 요 건방진 녀석 보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미유키는 꼼꼼하게 사와무라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코에 살풋이 사와무라의 샴푸 냄새가 닿았다. 이대로 목덜미에 코를 박아보고 싶은 충동을 조금만 뒤로 미루며, 미유키가 물었다.

 

"그게 그렇게 좋아? 별 도움도 안되는 거리수치가."

"당연히 좋지 않슴까. 미유키와 나의 거리를 알게 됐는데."

 

 순간 헉소리가 나려는걸 미유키가 급하게 틀어막았다. 일정한 템포로 움직이던 미유키의 손이 멈추자, 사와무라가 자기가 뭐 잘못 말했나? 하고 살그머니 눈을 떴다. 안돼, 절대 안돼. 지금 이 얼굴을 들켰다가는 10년 놀림감이 될지도 모른다. 미유키는 손에 힘을 줘 수건으로 사와무라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뭐에요?"

", 아니. 그런식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 조금 놀랬달지."

"역시 선배는 머리는 좋은데 상상력이 부족하다니까요."

 

 그렇게 말한 사와무라는 미유키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18.44미터 라는건 1844센치 라는거니까... 내 키가 175센치고."

 

 거리를 자기 키로 나누는 암산을 해보려는 건지 사와무라의 입에서 으음, 하는 소리가 났으나 당연하게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보다못한 미유키가 옆에서 거들어주었다.

 

"일자로 누운 네가 열명하고도 반절 더 있다는거네."


 일렬로 누워있는 열명의 사와무라라. 이건 좀 귀여울지도. 그런 미유키의 감상과는 다르게 사와무라는 히익, 하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그런 잔인한! 저를 반으로 자를 생각입니까!"

"먼저 이야기한건 너였잖아."

 

 머리는 이제 거의 다 말랐다. 축축해진 타월을 옆으로 치우며 미유키는 드디어 고대하던 사와무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예상 그대로 말랑말랑한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자, 간지러운 듯 사와무라가 키득이는 소리를 냈다. 팔을 뻗어 꼬옥 끌어안고, 사랑하는 연인의 체온을 온몸으로 느끼는 이 충실감. 이번에는 미유키가 눈을 감고, 사와무라에게 물었다.

 

"사와무라, 혹시 그럼 이건 알아?"

"뭘요?'

"사람의 보폭은 키에서 100을 뺀 만큼이래."

"그게 뭔 상관임까?"

"내 키에서 100을 빼면 79잖아."

"그렇슴다."

"시합 중에 내가 너한테 가려면 스물 세걸음 걸어야한다는 뜻이야."

 

 이번에는 사와무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미유키는 그 반응이 너무 좋아서, 한동안 계속 그 자세 그대로 사와무라를 놓아주지 않았다.


18.44미터.가까운 듯 먼 것 같은 투수와 포수의 거리, 너와 나의 거리.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는 거리. 미유키는 언젠가 재미로 계산해봤던 과거의 자신을 칭찬하며, 사와무라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들었다.

 

", 오늘의 이론 공부는 여기까지."



2015.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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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코미나토 료스케

글/다이에이 2016. 3. 25. 22:33

 

"아앗, 형님! 오랜만입니다!!"

 

 복도 끝에서 끝까지 또렷히 들려오는 후배의 목소리에 료스케는 발걸음을 멈췄다. 복도를 쩌렁쩌렁 메우는 저 목소리는 분명 하루이치의 친우이자 야구부 후배인 사와무라의 것일테다. 선배를 불러세우다니 여전히 배짱하나는 끝내주게 좋은 녀석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경기로부터 벌써 두 달. 그러고보니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맞대고 보는건 오랜만인것 같다.

 

"오랜만이네."

"잘 지내셨슴까!!"

"나야 뭐 그럭저럭."

"잘 지내신다니 다행입니닷!"

 

 기합이 팍팍 들어간걸 보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려나. 목청껏 소리 지르는 사와무라에게 조용히 하라며 정수리에 촙을 내리꽂자, 녀석은 머리를 싸매며 금새 깨갱하며 이쪽의 눈치를 살핀다. 즉각즉각 돌아오는 저 반응이 재미있어 시합 중에도 몇 번 괴롭힌적 있었지~ 료스케는 왠지 그리운 기분이 되었다. 사실 시간으로만치면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인데. 사와무라는 그 자세 그대로 료스케를 따라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오는 그 짧은 시간동안 다시 터진 입이 조잘조잘 팀의 근황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키지마 선배가 형님 이야기를 하면서..."

"전부터 생각했는데 말야."

"?"

"난 하루이치의 형님이지 네 형님이 아니거든?"

 

 그 말에 사와무라의 표정이 얼어붙는게 참 볼만했다.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고 싶은걸. 사실 이 건에 대해서 료스케는 언젠가 한 번 사와무라에게 이야기 하려고 했었다. 언제부턴가 형님~ 형님~하면서 자기를 부르는데, 연습 중이고 시합중이다보니 말 할 타이밍을 놓쳐서 어쩌다보니 은퇴한 지금까지 이야기를 하지 못했었다.

 

", 하지만 형님은 형님이고....!"

"그러니까. 네 형님이 아니라니까?"

"제 친우 하룻치의 형님은 저에게도 형님입니다!! 허락해주십쇼!"

"안된다면?"

", 그러면.... ... 어쩌면 좋을까요?"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되려 물어보는 바보같은 질문에 료스케는 결국 사와무라의 정수리에 다시 한 번 촙을 먹였다. 히잉 하고 울먹거리면서 따라오는 사와무라는 '료스케 선배? 코미나토 선배? 료상?.. 아니아니, 이건 너무 무례하겠죠?'하며 연신 료스케의 새로운 호칭에 궁리했으나 딱히 수확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저 예전에 형님에 대해 오해를 한 적이 있는데요."

".... 뭔데?"

 

 형님 호칭에 대해서는 그만 포기 해야 하나. 료스케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사와무라에게 되물었다.

 

", 처음에 형님이랑 하룻치랑 굉장히 사이 안좋은 줄 알았지 뭠까. 형제라면서 제대로 대화도 안하고, 연습때도 도와주기는 커녕 살벌한 말이나 던지고."

"호오."

 

 그렇게 보였나.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싶었다. 딱히 차갑게 대한건 아니지만 그렇다고해서 잘해준 것도 아니니까. 그 이야기를 들으니 료스케는 하루이치가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겪어보니 그게 아니더라구요. 형님은 하룻치의 좋은 형님이에요. 선수로서도, 형님으로서도."

 

 갑자기 직구냐. 료스케는 무표정을 유지하느라 꽤나 애먹었다. 대놓고 면전에서 이런 평가를 받은건 처음인 것 같은데. 역시 이런건 사와무라의 타고난 성격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지. 료스케가 당황스러워 하건 말건 사와무라는 계속해서 종알거렸다.

 

"저는 외동이라, 형제에 관한건 잘 모르지만 어쨌든 하룻치가 부럽다고 생각했슴다. 이런 든든한 형님이 있어서 얼마나..."

"비행기는 적당히 태우지 그래."

 

 이쯤에서 차단하지 않으면 표정이 무너져 버릴것 같아, 료스케는 사와무라의 말을 잘랐다.

 

"은퇴한 3학년에겐 더 이상 떨어질게 없다구."

"왜 없습니깟!! 든든한 정신적 지주! 하룻치와 저의 형님!!"

"... ..."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계속하다보니 어느새 기숙사 앞. 5호실 문 앞에서 료스케를 배웅하는 사와무라의 시끄러운 목소리에 문이 열리며 쿠라모치가 튀어나왔다.

 

"너임마 사와무라, 기숙사에 왔으면 얼른 들어올것이지 시끄럽게..... 앗 료상!"

 

 그러고보니 이 녀석도 언제부턴가 친근하게 료상이라고 불렀는데. 이제와 딱히 불만이 있는건 아니지만, 사와무라와 쿠라모치를 보던 료스케는 왠지 묘한 기분이 되었다.

 

"5호실 녀석들은 역시 건방지네~ 다음에 한 번 다같이 깊은 이야기를 해볼까나."

"에엣?? 갑자기 그게 무슨?! 사와무라, 너냐? 네가 또 뭔가 저질렀냐?"

", 아니에요!! 아파욧, 전 그냥 형님이랑 이야기를.... , 형님 들어가십쇼!"

 

 사와무라의 우렁찬 목소리를 뒤로하고, 형님 코미나토 료스케는 2층 방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뭐, 형님이든 료상이든 이제 와 무슨 상관이랴. 귀여운 후배들이고, 진심으로 자기를 존경하고 있으며 앞으로 세이도를 이끌어 나갈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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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와] 2월 28일

글/다이에이 2016. 3. 25. 22:30

 

 고백을 했다. 석양이 가득한 빈 교실에, 혼자 앉아서 스코어 북을 보고있던 한 학년 위의 선배에게. 고백은 꽤나 돌발적인 것이었고, 선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걸 보며 나는 천천히 대답을 기다리기로했다. 마음이야 뭐, 지금 당장 멱살을 잡아서라도 답을 듣고 싶었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까.


 선배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고, 손에는 여전히 스코어 북을 들고 있는 상태에서.

 

", 미안. 당황스러워서."

 

그 말에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있다가 대답해도 될까? ...그러니까 29일에."

 


 29일이면 바로 내일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여버린 탓에, 나는 고백의 답을 4년 후에나 듣게 되었다.






201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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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와] 감기와 토끼사과

글/다이에이 2016. 3. 25. 22:24


 

 찰박찰박, 기분좋은 물 소리에 미유키가 천천히 눈을 떴다. 하얀 천장, 그리고 동시에 눈 앞에 펼쳐지는 기이한 광경에 미유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대야를 방 한가운데다 놓고는 물장난을 치고있던 에이준이 미유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 선배. 일어났어요?"

"뭐야 사와무라. 남의 방에 멋대로."

 

그 말에 에이쥰이 발끈 하려다가 '내가 참는다'하는 얼굴로 바닥에 푹 주저앉았다. 뭐야, 평소같지않게. 좀 더 바보같이 덤벼들 줄 알았는데. 에이준은 그런 미유키의 반응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이마 위에 반접은 수건을 올렸다.

 

"오늘은 환자니까 제가 특별히 참는거에요."

 

 아, 시원하다. 그제야 미유키는 평소같지 않은게 에이준이 아니라 자신이라는걸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였지. 조금만 하고 쉰다는게 연습 분위기가 살벌해 그만 휩쓸리고 말았다. 불펜 투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 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다음이 기억나지 않는다.

 

"저기, 나 어떻게 된거야?"

"기억 안나요? , 남은 이렇게 고생을했는데 하나도 기억을 못한다니 역시 미유키 카즈야!!"

"됐고, 누가 날 데려온건데?"

"진짜 기억 안나는거에요? 불펜연습 끝나고 나오는 길에 쓰러졌잖아요 선배. 마침 제가 옆에서 받아들었기에 망정이지 정말 위기 일발이었다니까요."

"그래그래, 고맙다."

 

 에이준이 칭찬을 바라는 새끼강아지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미유키는 오늘만은 순순히 칭찬해주기로했다. 사실은 받아쳐 놀려줄 기력이 딸리는 것 뿐이었지만.


그나저나, 주장이란 녀석이 꼴사납게 컨디션 조절을 못하고 쓰러지다니. 이래서야 야구부 녀석들을 볼 낯이 없다. 나중에 쿠라모치가 놀릴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온다. 어쨌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미유키는 현재 눈 앞에 닥친 상황부터 정리하기로했다. 물장난을 하는가 싶었더니 수건을 빨기 위해 가져다 놓은거였나. 대야 주변이 물바다인것으로 보아 나중에 청소는 자기 몫이다 싶어 미유키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 있었던거야?"

".... 7시 부턴가?"

 

 그 질문에 에이준이 황망하게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밖에서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걸 보니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닌듯 싶었다.

 

"그래, 어쨌든 오늘은 수고를 끼쳤네. 그럼 이만 가서 자라."

"......"

"?"

"아니, 미유키 입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이상해서..."

"그러니까 반말 쓰지 말라고... 일단은 선배니까."

", 그 말을 들으니 안심임다. 역시 미유키는 미유킴다."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는군. 미유키는 이쯤에서 적당히 대화를 끊으면 알아서 돌아가겠지 싶어서 입을 다물고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머리가 뜨겁게 느껴지는걸보니 역시 내일 연습은 무리려나. 짧은 시간동안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방심한게 문제였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코 닿는 거리에서 에이준이 자기를 멀뚱멀뚱 쳐다보고있는게 아닌가.

 

"야이...!!"

 

 너무 당황해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것 밖엔 하지 못한 미유키에게 에이준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

"안경 끼고 자면 안되요."

"..... 그래, 고맙다."

 

 저 바보 녀석은 어디까지 사람 맘을 들었다 놨다 할 셈인지. 미유키는 평소라면 유연하게 대처하고도 남았을 일에 쩔쩔매는 자신의 한심함에 화가 다 나려고했다. 사와무라 에이준, 내가 다 낫기만해봐라. 그대로 갚아줄테다.

책상위에 비스듬히 안경을 내려놓은 에이준은 답지않게 부지런떨며 다시 한 번 미유키 이마 위에 두었던 수건을 갈아주었다. 역시 아프긴 아픈 모양인지, 기운없는 목소리로 빌빌거리는 미유키를 보고있으니 에이준의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져서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야, 왜 안가."

"역시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까하는데요."

"....?"

"미유키가 빨리 나아야 다시 제 공을 받아줄거 아녜요."

"그런 걱정 안해도 나을테니까."

"아픈 사람답게 어리광도 좀 부려보고 그래보십쇼. 선배는 귀여움이라는게 전혀 없어요."

"너한테 그런소리 듣고 싶진 않거든?"

 

 어쨌건 에이준은 오늘 여기서 자고 가기로 마음먹고 쿠라모치 선배에게 문자를 보냈다. 보내자마자 바로 전화가 와서 당장 내려오라는 큰소리가 났지만 '제가 돌보지 않으면 미유키 선배가 낼 변사체로 발견될지도 모름다.'하고 얼른 끊어버렸다. 다행이도 아까 미유키의 상태를 봐서인지 굳이 윗층으로 달려오지는 않았으나 에이준은 내일 일이 심히 걱정되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미유키는 피식피식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전화를 내려놓은 에이준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러고보니 종합감기약을 가져왔는데."

"뭐야, 그런게 있으면 빨리 내놓으라고."

"빈 속에 먹으면 안된다고해서 말임다. 선배 저녁식사 안했잖아요?"

"....."

"잠깐만 기다려보십쇼."

 

 에이준은 그대로 몸을 틀어 미유키의 간이 냉장고를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어이어이, 남의 냉장고를 그렇게 마구잡이로 뒤지는 녀석이 어디있냐. 그렇게 꿍얼거려보았으나 에이준의 귀에는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 이렇게 쓰잘데기 없는 것만 가득임까. 도무지 도움이 되는게 없... ."

 

 탄산음료라던가, 유통기간이 지나서 딱딱해진 빵, 장기 말 (테츠 상이 넣어둔 모양이다)등을 꺼내던 에이준이 보물이라도 발견한것 처럼 눈을 빛내며 냉장고를 닫았다.

 

"그런거 사다놓은 기억 없는데."

"선배들 중 누가 넣어놓은 거겠죠."

 

 다행이라는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에이준이 과도와 접시를 가지고 침대 앞으로 무릎걸음으로 걸어왔다.

 

"저기, 잠깐만."

"뭠까. 환자는 가만히 계십쇼."

"네가 깎으려고?"

"문제 있어요? 선배가 깎을것도 아니고, 여기에 저 말고 누가 있는데요?"

 

 보고만있어도 불안해지는 광경이란 이런것을 두고 말하는게 아닐까싶다. 어린아이에게 폭탄을 들려놓은 듯한 심정이 되어 미유키는 손사래를쳤다.

 

"안돼안돼안돼, -대 안돼. 나 안먹어. 사과 안먹을거니까 당장 그 칼 내려놔."

"허어....."

 

 에이준은 벙찐 표정으로 미유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보란 듯이 과도를 들어 사과를 두동강냈다.

 

"병자는 병자답게 누워 계십쇼, 미유키 선..?"

"그쪽이야말로 투수라는 자각을 좀 더 가지시죠. 사와무라 후..?"

 

 몸에 열이올라 후끈후끈함이 느껴졌으나 미유키는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병자를 이정도로 피곤하게 하다니. 어지간히도 대단하다 사와무라.

 

"우우... 저 이래뵈도 사과는 잘깎는데."

"전혀 상상이 안되는데."

"이번 기회에 보는건 어때요."

 

 그렇게 말하며 에이준이 스리슬쩍 과도에 손을 댔다. 미유키가 말릴 새도 없이, 에이준의 손이 능수능란하게 사과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반으로 자른 사과를 다시 한 번 자르고, 또 다시 한번 반절로 자르니 먹기 좋은 크기가 된 사과의 껍질을 반쯤 발라내더니 살짝 들어올려 모양을 내기 시작한다. 그 거짓말 같은 광경에 미유키는 잠시 넋을 잃고 그것을 지켜보았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에 착착 감기는 사과의 붉은 껍질과 그 속에 들어있던 하얀 과육. 그리고 곧 이어 짧은 다듬질. 잠시 후 미유키의 앞에 토끼사과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졌다.

 

", 다됐슴다. 사와무라 특제 토끼 사과!"

"손가락은 안베였어?"

"절 도대체 뭘로 보는거에요."

"반푼이 후배?"

"....하여간에, 여튼 먹어 보십쇼. 먹고 약 먹은 다음에 자는거에요."

 

 미유키는 잠시 주저하며 에이준의 눈치를 살폈다. 에이준의 토끼사과라니, 왠지 먹기 아까운데. 에이준은 미유키가 주저하는걸 보더니 또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 독같은건 안넣었다구요."

"아니 그게 아니라."

"."

 

 투덜거리던 에이준은 갑자기 뭔가 깨달은듯 미안한 표정을 짓더니 쏜살같이 찬장으로 달려갔다. 돌아온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것은 작은 포크. 아마도 미유키가 열 때문에 몸 가누기가 힘들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여간에 입이 조용하질 않으니 아프다는걸 자꾸 까먹잖아요. , 아 해 보십쇼."

"? 어어?"

 

 페이스에 휘말려 입을 연 미유키의 입안 가득 시원한 사과 향이 차올랐다. 오물오물 말없이 사과를 먹는 미유키를 보고 있자니 에이준은 왠지 간질간질한 기분이되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참 잘생겼는데 말이지. 저놈의 입이, 입이 문제란말이지. 자기도 모르게 미유키의 얼굴을 빤히 보고있던 에이준은 급하게 다시 정신을 다잡았다.

 

"뭐해?"

"? 아뇨."

"더 줘."

 

 역시 저 인간은 입을 열면 안된다니까. 이왕 이렇게 된거 누릴건 다 누려보자 싶은 속셈이 된 미유키와 얼결에 사과를 먹여주고 있는 에이준의 기묘한 저녁 시간이 흘러갔다.

 

 




 2015.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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